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105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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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1052호>
  • 김일송 공연 칼럼니스트
  • 승인 2019.03.17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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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내 이름이니까요! 내 평생에 다른 이름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오. 내가 거짓말을 했고 또 그 거짓말에 서명을 했기 때문이요! (......) 이름도 없이 나보고 어떻게 살란 말씀이오? 내 영혼을 당신께 넘겼으니 내 이름만은 남겨 놓으시오!”

슬랩스틱 코미디의 제왕 찰리 채플린, 미국 최초의 정상급 마에스트로 레너드 번스타인, 서사극의 창시자 베르톨트 브레히트, 미국의 양심을 대표하는 극작가 아서 밀러. 이 네 명의 공통점은 매카시즘의 희생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1950년 경력위조와 명예훼손, 금품수수, 음주추태로 정치적 사면초가에 몰렸던 공화당 상원의원 조지프 매카시가 공화당 당원대회에서 “국무성에 침투한 빨갱이 명단이 이 안에 있다”며 한 다발 서류뭉치를 꺼내 보였다. 그것이 훗날 매카시즘으로 불리게 된 공산주의자 색출 열풍의 시작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1945년), 중국공산당의 정권장악(1949년)이 있었던 때로, ‘레드 콤플렉스’가 절정에 달했던 시절이었다. 사람들은 매카시에게 동조했고, 누구도 반박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매카시가 내민 서류뭉치에 적힌 이름이 누구인지 확인할 수조차 없었다. 확인하려는 행동마저 ‘빨갱이’ 행위로 몰렸다. 정계와 재계, 학계, 문화예술계 등 다양한 분야에 공산주의자들이 암약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는 단번에 미국 정가의 유력인사로 급부상했다. 그는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반미활동조사위원회 위원장까지 맡았는데, 그로인해 수백 명이 수감되었고, 수천 명이 직장을 잃었다. 

극작가 아서 밀러는 그때 청문회에 불려 나온 인물 중 하나다. 그는 자신의 작품 <어느 세일즈맨의 죽음>을 연출했던 동료연출가 엘리아 카잔에 의해 공산주의자로 지목당해 청문회에 소환되었다. 엘리아 카잔은 말론 브랜도 주연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951)와 제임스 딘 주연의 <에덴의 동쪽>(1955)을 연출했던 영화감독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의 이름을 대라”는 청문위원들의 요구에 아서 밀러가 끝까지 거부했던 일화는 이미 유명하다. 

<시련>은 그때의 경험이 바탕이 되어 쓰인 희곡이다. 이 작품은 1953년 초연된 작품으로, 아서 밀러는 작품을 위해 1692년 매사추세츠 세일럼에서 집행되었던 마녀사냥 재판을 가져온다. 당시 이 사건으로 19명의 무고한 이들이 사형당하고, 1명이 고문 중 압사, 140여 명이 체포되었다. 


이야기는 마을소녀들이 한밤중에 숲에서 악령을 소환하는 놀이를 하던 모습을 목사 패리스가 목격하면서 시작된다. 패리스는 이 사건을 이용해 정적들에게 악마와 교류했다는 누명을 씌워 사형시킨다. 그러던 중, 주인공 프락터의 아내 엘리자베스가 누명쓰는 일이 발생한다. 프락터와 불륜관계였던 하녀 아비게일이 프락터를 독차지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이다. 아내를 위해 진실을 호소하는 프락터에게 판사는 다른 제안을 한다. “공산주의자들의 이름을 대라”는 청문위원들의 요구와 같은 제안이다. 악마와 교류했다는 허위자술서에 서명을 하면 아내의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판사는 제안한다. 가정을 지킬 것인가, 명예를 지킬 것인가. 

여기서 이 작품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다. 보통의 작가들이 세상을 선과 악으로 나누지만, 훌륭한 작가들은 이러한 이분법에 동의하지 않는다. 실제 우리가 숨 쉬는 세상도 그리 단순하지 않다. 아서 밀러는 선과 악이 아닌 선과 의 사이의 갈등으로 독자를 벼랑 끝에 몰아넣는다. 허위자백서에 서명하여 가족을 지키는 것이 선이라면, 서명을 거부하여 목숨을 바쳐 자신의 이름,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은 의다. 이로서 프락터는 현재의 비극적 영웅의 지위에 등극하게 된다.

“그건 내 이름이니까요!”로 시작하는 인용문은 그때 프락터가 하는 말이다. 아마도 아서 밀러의 심정이 반영된 대사가 아니었을까. 이 작품에는 ‘내 이름’이란 단어가 17차례 등장한다. ‘이름’은 56차례 등장한다. 이름이 곧 그 사람의 정체이며 신념이며 자존이며 모든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려던 건 아니었을까. 자,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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