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백마문화상] 비평 부문 가작 홀로그램 外 2편 - 이영민 학우(명지대학교 청소년지도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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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백마문화상] 비평 부문 가작 홀로그램 外 2편 - 이영민 학우(명지대학교 청소년지도학과)
  • 명대신문
  • 승인 2018.12.09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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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라밸’에 관해서

 

‘워라밸’이란 ‘work and life, balance.’의 줄임말이다. 앞 영어문장을 보면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용어는 일과 삶 사이의 균형을 의미한다. 이 용어는 사람들에게 일과 삶의 균형이 중요함을 강조할 때 흔하게 사용된다. 이 용어가 우리나라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그 영향력은 엄청났다. 이 용어 자체 혹은 이 용어가 담고 있는 문제의식 등의 사회적 담론들은 뉴스나 커뮤니티 내에서나, 일상의 대화 속에 펼쳐져 있다. 하지만 이 용어 자체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은 채, 그런 글들과 담론들은 펼쳐지고 있다.

일하는 시간과 삶의 시간 간의 균형이 맞아야 한다는 이런 논의는 ‘문재인 정부’의 키워드 중 하나다. 2018년 ‘문재인 정부’는 ‘워라밸’을 언급하며 국민들에게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춰주어 질 좋은 삶을 보장해 준다는 명목으로 국민들의 근로시간을 주 52시간으로 단계적인 축소하는 것이 성사시켰다. 이런 상황 속에서 ‘워라밸’은 단지 요즘 유행하는 용어일 뿐 아니라 그 말에 공감하고 이에 영향을 받아 변화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단서이다. 우리는 이 단서를 통해 그 용어에 공감했던 이 사회의 구성원들의 생각을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지 생각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 용어를 자세히 살펴보는 것은 그 말에 공감하고 사용했던 사람들의 사상을 들추어 보는 것이다.

그런데 ‘워라밸’의 의미를 꼼꼼히 살펴보면 그 의미가 매우 이상하다는 점이 발견된다. 이 용어는 일과 삶을 구별해 사용하고 그것이 마치 대립(對立)적인 것인 양 그 사이의 균형을 찾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하는 것은 우리들의 삶의 일부가 아닌가? 우리가 일하는 그 시간은 우리 삶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사용되는 시간이 아니다. 우리들이 일하는 시간은 분명히 우리들의 삶의 시간 속에 포함되어 있는 시간이다. 그래서 ‘work and life, balance.’ 보다는 오히려 ‘worktime and non-worktime balance.’가 더 자연스럽다. 그리고 왠지 일을 삶에서부터 분리된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워라밸’이라는 용어에 잠재되어 있는 의도가 무엇일지 수상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렇게 개념적으로 이상한 용어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사상’이 사람들로 하여금 이 용어를 사용하도록 만들었을까? 이 글에서 나는 사람들의 생각에 무지 중에 내재되어 있던 바로 이 ‘사상’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나의 대안을 제시하고, 그것에 던져질 수 있는 비판들을 제시하고 다시 반박함으로서 나의 대안을 좀 더 명확하게 다듬도록 하겠다.

1) 대립 : 의견이나 처지, 속성 따위가 서로 반대되거나 모순됨. 또는 그런 관계. 

2) 사상 : 어떠한 사물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구체적인 사고나 생각.

‘워라밸’의 문제

왜 사회에서 이 용어를 사용했던 사람들이 work와 non-work를 구별하여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work와 life를 구별했던 것일까? 이것은 일하는 것이 삶과 분리되어 존재한다는 실제적인 구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기보다 우리가 살아있는 것 같은 느낌을 일하는 시간 중에 느끼지 못한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더 설득적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일상에서 사용하는 말로 ‘살겠다.’는 말이나 ‘죽겠다.’는 말을 사용하는데, 그 말은 우리가 사실적으로 살고 죽었다는 의미라기보다 오히려 그런 삶과 죽음의 느낌을 느꼈다는 말이다. 우리 사회에서 ‘워라밸’이 work와 life를 구별한 이유도 여기서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 사회의 담론들에서 이 용어는 보통 삶의 질을 개선해야한다는 주장을 할 때 사용된다. 우리들은 삶의 질이 변화되었는지 판단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있는 것과 같은 기분을 느끼는지에 초점을 두고 있을 때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다. 그래서 이때 삶의 질을 개선해야 한다는 것은 그저 생존을 보장하는 것 보다는 살아있는 기분을 충실하게 느낄 수 있도록 개선해야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어울린다. 이렇게 우리가 삶이라는 용어를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맥락과 ‘워라밸’이라는 용어가 사용되는 맥락이 비슷하다는 점과 우리의 모든 일하는 시간이 우리의 살아있는 시간에 존속될 수밖에 없는 점을 고려할 때 ‘워라밸’이라는 용어에서의 삶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충실히 느낄 때의 삶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럼에도 ‘워라밸’이 이토록 대중적으로 사용되고 많은 담론 내에서도 이 용어가 다루어 졌던 이유는 위의 설명만으로는 설명되어지지 않는다. 이 용어가 사용될 때 가장 구체적인 형태로 제시되는 주장은 ‘일하는 시간’과 ‘삶의 시간’의 균형이다. 이 때 이 둘의 관계는 대립적인 것으로 제시된다. 때문에 이 현상이 설명되어 지기 위해서 사람들이 ‘일의 시간’과 ‘삶의 시간’을 어떻게 구별하고 대립되어지는 것으로 여기는지 그리고 그렇게 만드는 것이 무엇일지 여기서 논해야 하겠다. 일하는 시간 중에 우리가 살아있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살아있는 것과 대립적으로 여겨지게 하는 것은 먼저 일하는 것이 삶에서 분리되어 지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 분리는 느낌에서의 분리뿐만 아니라 일에 관한 사람들의 관념이 삶의 관념에서 완전히 분리되어질 뿐 아니라 그 둘이 양립되어지지 않는다는 ‘사상’을 믿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개념의 분리 즉, 일하는 것의 관념과 삶의 관념 간의 분리가 없다면 우리가 ‘일하는 시간’과 ‘삶의 시간’을 대립적으로 여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분리된 두 관념이 대립적인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일하는 시간’과 ‘삶의 시간’이 양립될 수 없다는 조건이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일하는 시간’은 ‘삶의 시간’과 공존하지 않고 ‘삶의 시간’을 침해한다. 이런 두 조건을 가능하게 하는 ‘사상’은 ‘일’하는 것을 삶과 분리된 것으로 여기고, 삶을 침해하는 것으로 여기게 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워라밸’이 이상한 용어임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사용되었던 것은 바로 이 ‘사상’ 탓이다. 이 ‘사상’이란 ‘일’은 우리의 ‘삶’을 방해하는 요소로 여기는 생각과 태도 등이다. 이런 ‘사상’으로 현대인은 일하는 중에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일하는 시간’과 ‘삶의 시간’을 대립적인 개념으로 상정하고, 그 균형을 어떻게 맞춰야 하는지를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삶’과 ‘일’의 관계

하지만 정말로 우리들의 삶과 일은 과연 분리되어 있고 대립적인 관계인가? 이제 우리는 위에서 살펴보던 맥락에서 벗어나 우리의 삶과 일의 본래적인 관계를 다시 분명히 할 필요가 있겠다. 이렇게 분명하게 함으로써 우리는 ‘워라밸’에 있던 삶과 일의 관계 설정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한 작업으로 나는 여기서 주체와 객체라는 용어를 활용해 삶과 일의 관계를 명시적으로 드러내도록 하겠다. 여기서 주체와 객체라는 용어가 어떻게 사용될지 그 의미를 먼저 설명하자면, 주체란 우리 인간들 즉 우리들의 삶을 살아가는 각 개인을 의미하고 객체란 각 개인의 경험적 대상이 되는 세계를 의미한다. 우리가 이 주체와 객체 간의 관계를 분명히 하면 삶과 일의 관계를 명시적으로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주체가 만약 객체와의 관계를 갖지 않고 고립된 채 존재한다면, 그것은 주체가 그저 존재하는 것일 뿐이다. 사람들이 기절 상태에 있거나 식물인간으로 있을 때에는 그저 생존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상태에서 주체는 세상이라는 객체에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가 없다. 결국 이 세상 속에서 자신의 존재는 소외당하고 잊힐 뿐이다. 이렇게 잊히고 소외된 주체는 자신의 존재가 거부당했다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즉 자신의 삶이 거부당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또한 이런 상태에서 주체는 자신의 개성을 모른 채 보게 된다. 왜냐하면 주체의 개성이라는 것은 주체가 타자인 객체와의 관계 속에서 발견되는 차이점을 통해 규정되는 것이다. 즉 주체는 타인인 객체와 관계하여 자신과 그 타자 사이의 차이점을 발견하고 이런 차이점을 통해 개성적인 자신을 규정하는 것이다.

반면 객체와 상호관계 맺을 때의 주체는 자신에서 비롯된 삶을 살아내고 그리고 자신의 모습 혹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객체 가운데 드러내는 삶을 산다. 이 주체는 객체와 관계함으로 자신의 개성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 주체는 객체 가운데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사유할 수 있게 된다. 이전의 주체는 사실 독자적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자신의 개성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자신의 개성을 파악한 주체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사유를 통해 알게 된다. 이것은 객체와 자신 간의 차이를 매개로 해서 이루어지는 사유인데, 그래서 이 사유는 객체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구현시키도록 주체를 추동시킨다. 이로 인해 주체와 객체는 주체가 객체에 작용하는 방식으로 관계를 맺게 된다. 이런 관계는 주체가 가장 자유로운 상태가 될 수 있는 단초이고, 삶을 가장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상태이다. 이런 관계 즉 주체가 객체에 작용하는 방식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일하는 것이다. 물론 일하는 것만이 그런 관계라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일하는 것을 통해서 그런 관계를 누릴 수 있다. 일하는 것을 통해 주체인 우리는 단지 객체로 부터의 영향을 수용했던 관계에서 벗어나 주체가 객체에 작용하는 관계로 나아간다. 그래서 주체가 자유로운 삶을 일하는 중에 느낀다는 것은 주체가 가장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누리는 것이다. 이때 일과 삶의 본래적인 관계가 드러나는데, 일이란 본래적으로는 주체가 객체 가운데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가장 적극적인 수단 중 하나다.

그런데 주체가 자신의 원하는 바를 객체 속에서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펼치는 중 주체는 자신이 구상한 일이 객체로 인해 제약되어지는 것을 경험하기도 한다. 이로 인해 주체는 고통이나 소외감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기도 하지만 이런 제약이 극복됨을 경험하면서 행복과 성취감과 같은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데 이 때 부정적인 관계를 느끼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일하는 것을 단지 삶을 유지하는 데에만 제약해두어 자신의 생각이나 뜻을 세상 속에 구현하고자 하는 기획을 포기한다. 이때의 삶은 자신이 겪게 될 고통이 포기된 동시에, 자신이 느낄 수 있던 긍정적인 기분 또한 포기된 것이고,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 또한 포기된 것이다. 이런 삶은 자신의 삶을 충실히 느끼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삶을 충실히 느낀다는 것은 자신을 세상 속에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중 긍정적인 기분이나 부정적인 기분이나 모두 느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워라밸’에서의 일은 우리의 삶을 누리고 느끼는 것으로서의 일이 아니다. 오히려 삶과 대립적인 위치에 상정되어진 것이다. 사람들이 이 용어에 많이 공감하고 사용했을 때, 그 각각의 사람들이 용어를 사용했던 의도들을 모두 찾아내기는 힘들겠지만, 지금까지의 얘기를 바탕으로 추리해보자면, 아마 사람들은 자신의 뜻을 전개하며 겪게 되는 고통들에서부터 무디어지기 위해 일이라는 관념을 마치 그저 삶을 유지하는 것으로서만 파악하려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가? 우리들이 무지 간 이런 용어 사용에 동의하는 것에서 먼저 벗어나도록 제시해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삶을 충실하게 누리도록 일하는 영역을 우리의 삶에 대립적인 위치에 상정해 두지 말고, 오히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드러내는데 최적의 영역이라는 위치에 상정해야 한다고 제시해야 한다.

 

제기 될 수 있는 비판과 이에 대한 대답

하지만 혹자는 나의 주장에 반대하여, ‘주체적인 존재로서 우리는 굳이 객체로서의 세상과 관계하지 않는다고 해서 자신의 삶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말하자면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서 존재하고, 그럼으로 우리가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 만으로도 충분히 자신의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비판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을 충분하게 누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봐야한다. 자신의 삶을 충분하게 누린다는 그 기준을 정하는 것은 누구이어야 하는가?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삶을 충분하게 누리는 것은 주체가 자신으로서 분명히 전제되어야 한다. 즉 전제되어진 주체가 자신이기 때문에 그 기준은 주체에게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주체에게 자유가 주어져야만 주체가 자신의 삶을 누리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런데 이때 자기 자신으로만 존재하는, 생존하는 것으로의 삶은 사실 자신이 원해서 생존한 것이 아니다. 자신이 원하지 않았을 지라도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것이 바로 생존이다. 물론 이후 자신의 의지대로 그 생존을 그만둘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생존을 지속하는 것은 주체의 자유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럼으로 자신의 삶은 충분히 누린다고 할 때 그 기준을 정하는 것이 자기 자신이라면 이 주체는 단지 독자적으로 존재할 때에 그런 자유와 삶을 누리지 못하고 오히려 객체와 관계할 때에야 비로소 그것을 누리게 된다.

또한 이런 비판도 제기될 수 있다. ‘주체로서의 우리가 객체로서의 세상 가운데 살 때, 객체가 갖는 힘의 영향력 하에 있고 이로 인해 (적극적으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나의 주장 따르자면 엄청난 고통을 받을 수 있다. 때문에 (적극적으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나의 주장은 잔인한 주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삶을 살기 보다는 객체의 힘을 의식하고 이에 맞추어서 살아가야 한다.’고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이에 대해 대답하자면, 먼저 우리는 이런 현실적인 대응을 강구하는 식의 비판이 흔히 말하는 듯이 우리에게 필연적인 미래가 주어지는 것을 우리 인간들이 상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처해질 모든 상황 속에서 적극적으로 산다고 해서 불행해질 것이라고 미리 단정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미리 미래가 불행할 것이라고 단정 짓는 생각에 빠져들어 적극적으로 살아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행복을 느낄 수 없다는 무료함에서 아무런 열정 없이 삶을 수동적으로 살게 될 것이다. 이런 수동적인 삶은 사실 그 자체로 삶의 생동감과 자유를 결여한 삶이다. 비록 아픔과 같은 부정적인 기분들을 덜 극적으로 느끼겠지만 동시에 행복과 같은 긍정적 기분들도 단번에 포기해 버린 것이다.

우리는 이제까지 work life balance라는 용어와 그것을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현대 사회 사람들에 내재되어 있던 ‘사상’ 즉, ‘일’과 ‘삶’을 분리하여 서로 대립하게 만들고 ‘일의 영역이 삶의 영역을 침해한다는’ 모함이 무엇인지 분석해 내었다. 그것은 적극적인 삶을 살아갈 때에 느껴지는 기분들 중 부정적인 기분을 배제하기 위해서 가장 적극적으로 살아낼 수 있는 방식 중 하나인 ‘일’을 ‘삶’의 영역에서 추방하는 시도다. 하지만 주체인 우리가 객체인 세상과 가장 적극적으로 관계 방식이 바로 ‘일’임을 드러냈고, 이로써 ‘일’을 ‘삶의 영역’에서 몰아내려는 소극적인 삶의 태도는 부정적인 기분을 배제할지는 몰라도 동시에 긍정적인 기분마저도 배제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니 우리는 work life balance라는 용어에 내재된 일에 관한 모함에 속아 자연스럽게 사용했던 담론 등에서 벗어나, 일의 영역을 우리의 삶의 영역으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일의 영역에서 우리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태도를 함양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런 도전이 바로 충실하게 삶을 살아내는 방식이며 동시에 우리들에게 큰 기쁨을 안겨줄 수 있는 가능성을 담지해둔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고통을 두려워하여서 적극적인 삶을 살아내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수상 소감

안녕하세요. 비평부문 가작에 선정된 글을 쓴 이영민입니다. 우선 가작으로 선정 받을 수 있도록 몇 년 동안 옆에서 지도해 주신 청소년지도학과의 권일남 교수님, 철학과의 강순전 교수님, 김윤구 교수님께 감사의 말을 올립니다. 저는 청소년지도학과 출신입니다만, 현재 철학과를 복수전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저를 소개할 때마다 제가 청소년지도학과라고 소개하며 철학과를 복수 전공하고 있다고 덧붙여 말합니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왜 굳이 철학과를 복수전공하고 있냐고 물어봅니다. 왜냐하면 철학과에서 배우는 것은 대개 무용한 것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죠. 하지만 철학은 존재하는 것과 모든 현상들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관점들과 지식들을 제공해 주는 학문이기 때문에 매우 유용한 학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요번에 가작으로 선정된 제 글도 철학의 덕을 많이 보았습니다. 특히 일에 관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것은 얼마 전에 소천하신 명지대학교 철학과의 원로 교수님인 故 임석진 교수님의 연구논문을 읽고 많은 도움을 얻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저와 제 글이 철학의 은혜를 입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적게나마 철학의 효용을 적은 것이 철학에 보답하는 것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심사평

2018년도 백마문화상 비평 부문에 응모된 글은 총 16편이었다. 두 명의 심사자가 응모된 글을 읽고 의견을 조율해 심사 결과를 도출하였다.예술작품이나 사회현상에 대한 비평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덕목은 균형 혹은 조화일 것이다. 비평은 아직 완결되지 않고 현재 진행 중인 현상을 다룬다는 점에서 민첩할 수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공인된 이론처럼 안정성을 갖추기는 어렵다. 지금, 여기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 중 무엇이 중요한지, 또 그것을 어떻게 봐야 할지를 논의하는 비평에는 평자의 가치 판단이나 주장이 개입할 여지가 상대적으로 많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개인적이거나 주관적인 내용이 지나치게 많다면 그 비평이 독자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비평이란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 개별적인 것과 일반적인 것, 변하는 것과 안정적인 것 등 여러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양극단에서 균형 혹은 조화를 찾는 작업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번에 응모된 글에서는 당선작 없는 가작만을 선정할 수 있었다. 「워라밸에 관해서」는 ‘일과 삶의 균형’을 뜻하며 요즘 우리 사회의 가치관을 대표한다고 할 만큼 널리 유행하고 있는 ‘워라밸’이라는 신조어를 꼼꼼하게 살피고 있다. 이 글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기 쉬운 ‘일’과 ‘삶’의 본래적 의미를 확인하고, 나아가 보다 나은 삶의 추구를 요청한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런데 평자 본인의 논증에 충실하겠다는 의도는 잘 알겠으나 그 과정이 다소 장황하다는 인상을 준다. 일과 삶, 또 좋은 삶에 대한 기존의 연구가 많이 있으므로 이를 적절히 인용하면서 이 글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충분하고 적극적인 삶’에 대해 좀 더 본격적으로 논의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육민수교수 (방목기초교육대학) / 이수형교수 (국어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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