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백마문화상] 소설 부문 가작 주머니 속의 칼 - 김선주 학우(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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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백마문화상] 소설 부문 가작 주머니 속의 칼 - 김선주 학우(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 명대신문
  • 승인 2018.12.09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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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머니 속의 칼

 

은빈은 종종 지현을 떠올렸다. 지현은 은빈과 함께 입시 미술을 공부하던 친구였다. 지현은 무슨 일이든 확신을 갖고 있었다. 처음에 지현은 은빈과 같은 순수 미술반이었다. 지현은 그리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편은 아니었다. 그림보다는 은빈과 노닥거리거나 순수 미술반 선생님에게 특이한 별명을 붙여 반 친구들을 웃게 만들었다. 은빈은 유화 작업을 하다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지현을 자주 봤다. 지현은 6개월 뒤에 산업 디자인반으로 옮겼다. 지현은 빼곡하게 스케줄을 정리하였고 가고 싶은 대학, 미래에 입사할 회사와 직무 종류까지 다이어리에 적어 놓았다. 지현은 그래픽 디자이너가 여러모로 기업에서 채용되기도 쉽고 전망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지현은 미술 학원에서 그림을 그리지 않고 신문을 읽거나 대학교에 제출할 자기 소개서를 고치곤 했다. 반이 달라진 뒤 은빈은 지현과 자주 만나지 못했다. 은빈은 당시 포트폴리오를 만드느라 여념이 없었다. 몇달 뒤에 지현으로부터 학원을 그만두었다는 문자를 받았다. 지현과 다시 마주친 것은 대학교에 입학한 뒤였다.

여행을 제안한 건 지현이었다. 은빈과 지현은 처음으로 함께 P시로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P시는 버스로 3시간쯤 걸리는 곳이었다. 관광 특구로 지정된 P시는 관광 사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버스 노선을 정비하였으나 여전히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았다. P시는 바다 위에 커다란 산맥이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섬이었다. 배를 타고 갈 수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몇 년 전 완공된 S시와 P시를 잇는 대교를 이용했다. 은빈은 버스 창문 밖으로 펼쳐진 바다의 빛깔과 그 위를 날아가는 갈매기를 봤다. 대교 너머로 바다가 잔잔하게 흔들렸다. 파도가 높게 치는 기암절벽과 그 절벽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산지는 나라의 특색을 그대로 보여주었기 때문에 최근에 외국인 관광객이 많았다. S시에 국제 공항이 있는 것도 한가지 이유였다. P시에는 신도시인 S시에서 볼 수 없는 우거진 숲이 많았다.

S시는 불과 10년 전에 P시와 마찬가지로 높은 건물이나 아파트 단지를 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S시에 국제 공항이 들어서면서 얼추 도시의 모양새를 갖추어나갔다. S시는 도시를 확장하기 위해 기업이나 대학을 유치하는 것에 힘썼고 그 노력의 일환으로 수도에 위치한 대학의 부설기관을 설립했다. 대학이 S시로부터 지원을 받는 대신 신입생들은 모조리 S시에서 지내야 했다. 은빈이 신입생으로 S시에 갔을 때 도시는 황량했다. 새로 지은 건물의 외벽에 하늘이 선명하게 반사되었던 것이 S시의 첫 인상이었다. 건물 안은 텅텅 비어 임대한다는 종이를 써붙인 곳이 대부분이었다. 은빈은 입학식 날 새 건물 냄새가 잔뜩 나는 강당에서 딱딱한 가죽 의자의 끝에 엉덩이를 걸친 채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은빈은 대학교 응원단이 무대에서 춤을 추는 도중 밖으로 나왔다. 대학교라기보다 다단계 회사에 가까울 정도로 강당 밖이 조용했다. 은빈은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거울을 보다가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지현이었다.

지현은 어느 날부터 약속을 자주 잊어버렸다. 지현은 대학생이 되고 나서 기업에서 홍보를 위해 대학생들을 모아 팀을 꾸려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행사에 자주 참여했다. 지현은 1학년부터 스펙을 쌓아야 한다고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그들과 찍은 사진을 은빈에게 자랑하기도 했다. 기업의 로고가 크게 그려진 티셔츠를 입은 열 댓명의 사람들이 단체로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긴장과 설렘을 가득 품고 갓 여물은 열매처럼 상기되어 있었다. 은빈은 지현을 따라서 행사를 몇 번 갔지만 기업에서 나온 직원들과 회식에 참석하고 싶지 않아 나중에는 거절했다. 은빈은 해야하는 과제가 많았다. 지현은 지치지도 않고 매번 모임에 나갔고 주말에 피곤한 얼굴로 은빈에게 사과했다. 지현은 약속 시간을 훌쩍 넘겨 나타나거나 은빈과의 약속을 바로 직전에 취소했다. 은빈은 그런 지현을 기다리거나 다음으로 약속을 미뤘다. 시간이 맞아서 지현과 만날 때면 유화 작업을 할 때마다 머리가 아픈 것과 과제로 나온 아르 브뤼 스타일의 작품을 장황하게 설명하기도 했다. 지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들었다. 그러면서도 지현은 중간중간에 미술에 대한 은빈의 예술적 지식과 열망에 얼마간은 감명한 얼굴이었으나 금세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 까맣게 잊었다. 지현은 자신의 노력이 보답 받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고 그 믿음이 강해질수록 은빈은 지현과 만나는 횟수가 줄었다. 지현은 곁에 있는 사람이 멀어지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이번 여행은 아침 일찍 출발하기로 했으나 지현은 절대 늦지 않는다고 호언 장담을 했다. 지현이 버스 터미널에 나타난 것은 은빈이 터미널 내의 카페에서 커피를 다 마신 이후였다. 지현은 미안하다고 열 댓번을 말했다. 은빈은 결국 지현에게 저녁을 얻어먹기로 했다.

버스에서 내리자 오후 세 시가 가까웠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곳은 바다였다. 버스 터미널 앞에 자갈 해변이 있었다. 은빈은 벤치에 앉아 까만 바위들 위로 부서지는 파도를 봤다. 여행지에서 과도하게 사진을 찍는 것을 은빈은 견디지 못했다. 지현은 바다에서 사진을 찍고 싶어했다. 지현이 바다를 등지고 서서 카메라 렌즈를 돌려 자신의 얼굴을 찍는 도중 남자 두 명이 지현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지현에게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다.

지현은 화장실에 가려는 은빈을 불러세웠다. 그들은 산림원에 갈 예정이었는데 마침 남자들과 목적지가 같다며 함께 다니자고 제안했다. 은빈은 그들이 카페에서 음료를 네 잔 사서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 마지못해 그러자고 대답했다. 키가 크고 코가 긴 남자는 상당히 말이 많은 타입이었다. 누군가를 웃겨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었다. 은빈은 억지로 웃어야 하는 일이 피곤했고 키가 작고 안경을 낀 다른 남자는 지나치게 진중하여 무슨 일이든 거창한 설명을 늘어 놓았다. 아는 것이 많았는데 몇 개는 틀린 말이었다. 은빈은 머리를 짓누르며 산림원에 가서 따로 행동하겠다고 지현에게 말하는 상상을 했다. 지현은 금세 그들과 친해져 웃고 떠들었다. 지현에게서 젊고 밝은 기운이 뻗어져 나와 잠시 은빈도 들뜬 기분이 들었다. 키가 큰 남자가 새우는 바다의 바퀴벌레라는 말을 했다. 안경 쓴 남자는 바퀴벌레를 먹어본 사람이 새우와 맛이 비슷하다고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덧붙였다. 은빈은 즉시 아니라고 대답했다. 갑자기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은빈은 곧 허무하고 영양가 없는 유머와 신경질적인 지식의 기 싸움 속에서 점점 지쳐갔다. 그 둘은 남자들끼리 여행 다니는 것이 남부끄러운 일이라고 여겼다. 은빈이 다소 날카롭게 그 말을 비웃자 남자들은 웃음기가 사라졌다. 지현은 은빈에게 그만하라는 표정을 짓고 그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애쓰기 시작했다.

산림원으로 가는 버스 정류장을 찾아갔다. 산 속에 덩그러니 깃발처럼 보이는 표지판이 생뚱맞게 세워져 있었다. 그 위에 빨간 글씨로 버스 번호가 적혀 있었다. P시는 바다에서 조금 멀어지면 풀이 우거진 곳이 많았다. 안개비가 내렸다. 공기 속에 축축한 물방울이 코 속으로 들어왔다. 눈에 보이지 않아서 알아채기가 쉽지 않았지만 옷이 점점 축축해졌다. 버스는 배차 시간이 길었다. 인터넷으로 확인했을 때는 이십 분 뒤에 차가 오기로 되어 있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늙은 여자가 서 있었다. 지현은 그 여자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이 동네 주민인 것 같다고 했다. 은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허름한 빨간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주위에 관심이 없는 표정으로 간간히 도로에 지나쳐가는 차들을 눈으로 쫓았다. 은빈은 여자를 보고 안심했다. 동네 주민이라면 버스가 오는 시간에 맞춰 나왔을 것이다. 그제야 은빈은 주위를 돌아봤다. 지나치게 한적한 도로였다. 도로에서 벗어나 조금만 들어가도 깊은 산 속처럼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그래서인지 은빈이 평소에는 보지 못하는 종류의 나비나 곤충들이 수풀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지현과 은빈이 그 여자를 의식하기 시작했을 때 여자도 그들을 힐끔거렸다. 나중에는 대놓고 눈이 마주쳤다. 은빈은 괜한 경쟁심이 들어 눈을 피하지 않았다. 수풀에 들어가 볼 일을 보고 나온 남자들은 지현과 그 여자에 대해 무어라 떠들었다. 그 중 키가 큰 남자가 그 여자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버스를 기다리냐는 말이었다. 여자는 입은 벌리지 않고 굳은 표정으로 계속 그들을 쳐다봤다. 지현은 여행 온 젊은이들이 신기해서 쳐다보는 것이라며 안심시키려 했다.

-10분 남았어요.

지현이 늙은 여자를 힐끔거리며 말했다. 늙은 여자는 시선을 거두었다. 10분 뒤에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는 정류장 표지판 바로 앞에 멈췄다. 버스에 타서 카드를 찍자 별안간 버스 기사가 소리쳤다.

-아이, 거참. 아가씨, 목적지를 말하고 카드를 찍어야지. 그렇게 무턱대고 찍으면 어떡해?

은빈은 죄송하다고 말하고 산림원에 간다고 말했다. 기사는 이제 와서 말해봤자 소용 없다며 한 번 더 짜증을 부렸다. 지현은 처음 여행 온 곳이라 잘 몰라서 그랬다고 기사에게 말했다. 기사는 말없이 신경질적인 헛기침을 했다. 뒤이어 탄 남자들은 앞다퉈 산림원으로 간다고 말했다. 빈 좌석이 거의 없었다. 지현은 버스의 맨 뒷좌석을 가리키며 은빈에게 앉으라고 속삭였다. 뒷좌석에는 외국인 커플들이 지친 얼굴로 잠들 듯 말 듯 앉아 있었다. 은빈은 그들 옆에 자리를 잡았다. 불현듯 지현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지현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버스에 서 있었다. 지현이 잡고 있는 손잡이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안개가 심해 도로 주위의 풍경이 잘 보이지 않았다. 온통 산이었고 길이 가팔랐다. 안개 속에 도로만 덩그러니 있는 것 같았다. 버스 안에는 은빈의 옆자리에 앉은 외국인 커플, 버스의 왼쪽 좌석에 백인 남자 그룹, 시끄럽게 떠드는 남자 대학생들이 있었다. 오른 쪽엔 중년 부부, 주민들이 앉아 있었다. 버스는 거의 꽉 찼다. 외국인 커플은 시종일관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서로 몇 마디 주고받았다. 은빈은 졸음이 쏟아져 그대로 의자에 기댔다. 깜빡 자고 일어났을 때 비릿한 가스 냄새가 버스 안에 가득했다. 버스 속도는 점점 느려졌다. 은빈은 잠에서 완전히 깼다. 사람들은 술렁거렸다. 기사가 갓길에 버스를 세우고 밖으로 나가 버스를 이리저리 둘러봤다. 창문 밖으로 기사가 어디론가 전화를 하며 불안한 듯이 같은 자리를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보였다. 잠시 후, 그는 버스가 고장이 났다고 다음 버스를 타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은빈은 버스 배차 간격을 떠올리고 순간 짜증이 밀려왔다. 옆자리의 외국인 커플이 은빈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는데 은빈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디스 버스 이즈 브로큰, 웨이팅 넥스트 버스, 하고 반복해서 말했다. 그들은 알아듣지 못했는지 무어라고 프랑스어로 이야기했다. 은빈은 그들이 신경질을 내듯이 이야기한다고 생각했지만 최대한 친절하게 대답했다. 커플은 알아듣는 것을 포기한 듯 기대어 눈을 감았다.

기사는 밖에서 버스의 상태를 확인했다. 비는 점점 더 안개처럼 변했고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지현은 난처한 얼굴로 그 옆에 있는 남자 일행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 시간 뒤, 다음 버스가 도착했다고 기사가 말했다. 이미 계획한 일이 틀어진 상태였다. 은빈은 지현에게 버스를 타고 시내로 가서 밥을 먹고 바로 숙소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지현 역시 피곤하다며 그렇게 하자고 할 것이다. 사람들이 다음 버스를 타기 위해 차례대로 내리기 시작했다. 은빈은 맨 뒷좌석에 있었기에 천천히 내릴 생각이었다. 은빈의 앞으로 외국인 커플이 끼어들어 먼저 나갔다. 다음으로 사람들이 갑자기 밀려드는 바람에 은빈은 지현과 꽤 멀어졌다. 지현은 앞서서 이미 차에 타고 있었다. 은빈은 거의 마지막으로 고장 난 버스에서 내렸다.

다음 버스는 조금 간격을 두고 뒤에 세워져 있었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뛰기 시작했다. 다음 버스는 만석이었고 심지어 서서 가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지현은 버스에 탄 채로 은빈에게 손짓했다. 은빈은 문 안으로 들어갈 엄두조차 낼 수가 없었다. 몇몇 사람들이 포기하고 다음 버스를 기다려야겠다고 말했다. 남자 일행들 역시 버스에 타지 못했다. 잠시 후 지현에게 전화가 왔다.

-이왕 탄 김에 마지막으로 산림원에 가려고.

지현이 말했다. 은빈은 뭐라고 덧붙일 말이 없어 재밌게 놀라고, 버스가 오면 바로 숙소에 가 있겠다고 했다. 지현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들떠 있었다.

기사는 시종일관 미안한 얼굴로 사람들에게 사과했다. 아까 은빈에게 짜증을 낼 때와는 다른 사람 같았다. 그는 회사에 전화해서 다음 버스를 보내 달라고 말했으나 언제 올 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남은 사람들 중 중년 부부가 기사에게 항의했다. 사람들은 중년 부부를 일제히 쳐다봤다. 마치 그들이 나머지 사람들을 대변해주길 바라는 눈빛이었다. 남자는 점잖은 교수처럼 사뭇 진지하게 기사에게 관련 법에 관해서 물었다. 기사는 회사와 이야기해봐야 한다고 말꼬리를 흐렸다. 남자가 버스 회사의 전화 번호를 묻고 직접 전화를 했으나 별 차도가 없었다. 억지를 부리지 않으려 노력하는 입꼬리를 가진 남자는 전화를 끊었다.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버스에 타지 못한 사람들은 남자 일행 2명, 중년 부부, 4명의 남대생들과 주민들 몇 명이었다. 택시는 외진 곳에 잘 오지 않으려 했다. 은빈은 몇 번이나 택시 회사에 전화했지만 부재중이거나 현재 있는 곳을 말하면 미안하다며 다른 차를 타라고 말했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늦여름이었고, 산이어서 그런지 점점 추워 지기 시작했다. 빗줄기는 약해졌지만 공기 중에 습기가 가득하여 햇빛이 사라지자 차가운 기운이 온몸을 감쌌다. 은빈은 짧은 바지를 입은 것을 후회했다. 겉옷을 하나 챙겨왔어야 했다. 두 손으로 팔뚝을 감싸며 주위를 둘러봤다. 남자 일행들은 급격하게 말수가 줄었다. 은빈은 이런 상황에 영양가 없는 말을 주고받을 만큼 그들과 친해지고 싶지 않았다. 남대생들에게 말을 붙여볼까 했지만 그들은 주위에 별로 관심이 없는지 차 안에서 핸드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중년 부부에게 다가갔지만 여전히 버스 기사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포기하고 버스에 들어가 있었다. 은빈은 버스 밖에서 뭘 기다리는지도 모를 것을 기다리다 슬슬 억울함과 추위가 밀려왔다. 지현은 연락이 없었다. 은빈은 지현에게 전화를 했다. 받지 않아서 문자를 남겼다.

‘여기는 아직도 버스가 안 와. 넌 어디야?’

잠시 후에 지현에게 전화가 왔다. 지현의 목소리를 듣자 갑자기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리가 지현의 핸드폰 너머로 들렸다. 지현은 수목원에서 만난 S시에서 온 대학생 무리와 같이 저녁을 먹으러 가는 중이라고 했다. 은빈은 버스 회사에서 차를 보내주지 않고 택시도 잡히지 않는다고 말했다.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괜히 짧은 바지를 입었다며 투덜거렸다. 지현은 버스가 곧 올 거라고 걱정 말라고 했다.

-기사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 지 모른다고 했어.

-괜찮을 거야. 조금만 기다려 봐.

순간 눈 밑을 날카로운 바늘로 찔린 것처럼 따끔했다. 은빈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맺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지현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은빈은 어딘지도 모르는 산 속에 갇혀서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과 하룻밤을 보내야 할 지도 모르는데 지현은 그에 비해 딴 세상처럼 평안했다. 은빈은 여유를 한껏 즐기고 있는 지현에게 그리 걱정되면 이리로 오라고 말하고 싶었다. 지현은 P시의 버스 시스템을 철썩 같이 믿고 있는 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지현은 계속 은빈을 다독였지만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은빈은 목소리가 더 떨려 아예 울음으로 바뀌기 전에 전화를 끊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현은 30분 마다 문자를 하라고 했다.

전화를 끊고 잠시 심호흡을 했다. 중년 부부가 은빈의 옆으로 다가왔다.

-아가씨 혼자 있어요?

은빈은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감추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럼 잘됐다. 우리가 P시에 아는 사람이 있는데, 차를 갖고 오기로 했어요. 자리가 있으면 같이 타고 가요. 시내에 내려 줄게요.

뜻밖의 일이어서 은빈은 멍하게 서 있다가 그들에게 연거푸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 그들은 은빈에게 버스에 가서 좀 쉬고 있으라며 차가 도착하면 깨워주겠다고 했다. 가방에서 긴 옷가지를 건네며 입고 있으라고 중년 부부 중 여자 쪽이 말했다. 은빈은 버스에 가서 지현에게 문자를 보낸 뒤 의자에 앉았다. 간신히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은빈은 버스 안에 있던 남자 일행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관심 없는 표정으로 멍하게 밖을 응시했다.

낮에 여행지를 돌아다닐 때는 여행이 아니라 잠시 밖에 나와있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밤에는 여행을 와 있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다. 묘한 떨림과 설렘 때문이기도 하지만 낯선 곳의 어두운 밤은 더욱 적응하기 힘들었다. 은빈은 얕게 잠이 들었지만 조그만 소리에도 놀라 깨기 일쑤였다. 남자 여행자들은 서로 무어라고 속삭이다가 멈추고, 다시 속삭였다. 주민들 중 몇 명은 가족들이 데리러 왔는지 차를 타고 갔다. 그들은 그다지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늘상 있는 일처럼 아무렇지 않게 차를 타고 금세 사라졌다. 남대생들은 서로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봤던 늙은 여자는 굳은 얼굴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휴대폰 배터리가 거의 없었다. 은빈은 할 일이 없었다. 남대생들에게 말을 걸었다. 남대생들은 쑥스러운 듯 웃다가 그 중 한 명이 불쑥 말했다.

-우리는 아침이 될 때까지 버스에서 노숙 하려고요. 아침이 되면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겠어요?

은빈은 살짝 웃으며 고생이 많다고 대꾸했다. 그들은 은빈에게 어떻게 할 예정이냐고 묻지 않았다. 은빈은 곧 버스가 올 거니까 조금만 기다리라고 덧붙였다. 그들은 대꾸하지 않았다. 버스 기사는 분주하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전화를 받더니 버스로 돌아와 새벽 5시에 첫 버스가 온다고 외쳤다. 사람들의 불만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남자 일행들은 기사에게 다짜고짜 다가가 따졌다. 은빈은 애써 눈을 감고 주위의 상황에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잠시 후 중년 부부 중 남자가 은빈을 흔들어 깨웠다. 은빈은 저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어 있었다. 시계를 보니 새벽 1시였다. 아까 지현에게 보냈던 문자에는 답이 없었다. 아직도 산림원에서 만난 대학생들과 있는 지도 몰랐다. 지현은 처음 만나는 사람과 술을 마시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술게임을 다 꿰고 있었다. 은빈은 지현이 혼자서도 여행을 즐기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한편으로 자신을 까맣게 잊은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지현이 약속 시간에 늦지만 않았어도 그들은 제시간에 도착해 산림원을 구경했을 터였다. 은빈은 버스에서 내려 남자를 뒤따라갔다. 여자 앞으로 작은 차 한 대가 섰다. 차 안에 세 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없었다. 은빈이 그 차에 타고 가려면 누군가의 무릎 위에 앉아야 했다. 여자는 자신의 무릎 위에 앉아서 가겠냐고 물었고 은빈은 고개를 저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혼자 오는 건데.

운전자가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젊은 남자였다. 그의 옆자리에는 아내와 어린 아이가 아내의 무릎 위에 앉아 은빈을 쳐다봤다. 부부는 난처한 눈으로 은빈을 봤다. 은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차에 올랐다.

-미안하게 됐어요, 아가씨. 조금 있으면 차 올 거야. 걱정마요.

여자가 창문에 눈만 내놓고 말했다. 남자 쪽은 아예 은빈을 보지도 않았다. 아무 말 없이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별로 미안해 보이지도 않았다. 은빈은 인사도 하지 않고 휙 돌아섰다. 창문이 닫히고 차가 씽 지나갔다. 외진 곳이어서 다른 차는 한 대도 지나가지 않았다. 차의 서치라이트가 서서히 옅어졌다. 은빈은 버스로 돌아갔다. 지현에게 문자를 보낼 생각이었다. 그러다 지현이 문자를 확인하지 못할 것 같아 전화를 했다. 지현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은빈은 크게 어-디-냐-고, 하고 띄엄띄엄 소리쳤다. 지현은 졸린 목소리였다. 숙소에 도착해서 잠을 자고 있었다고 대답했다. 지현은 언제 오냐고 물었다. 은빈과 지현이 돈을 모아 같이 예약한 숙소였다. 은빈은 길 한 가운데서 밤을 지새울 판이었다. 은빈은 목소리가 떨리는 걸 감추려 퉁명스러운 어조로 아침이나 되어야 간다고 했다.

-알겠어. 아침에 보자.

은빈은 침묵했다. 그 뒤에 다른 말을 기다렸지만 그게 끝이었다.

-넌 걱정도 안 되니? 여행 같이 온 친구가 한 밤중에 산 속에 갇히게 생겼는데.

-걱정 되지. 아까 어떤 부부가 차에 태워준다고 했다며?

-자리가 없어서 못 탔어.

지현은 말이 없었다.

-너 혼자 여행하니까 좋았어?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지현은 피곤하다는 투였다. 은빈은 점점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머리에 열이 돌았다,

-내가 그렇게 연락을 했는데, 어떻게 걱정된다는 문자 하나 안 보낼 수가 있어. 애초에 네가 늦지만 않았어도…

어느 새 은빈은 울먹이고 있었다. 이럴 작정은 아니었다. 지현은 신경질적인 목소리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그럼 어떡해? 네가 재빠르게 버스에 탔어야지. 사람들 내릴 때 안 내리고 뭐 했어? 그 때 버스 기사한테 친구가 버스에 못 타서 내려 달라고 했는데 사람이 많아서 그랬는지 내려주지 않더라.

은빈은 확 눈물이 나올 것 같아 목구멍으로 삼켰다. 지현은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아침에 해 뜨자 마자 버스 타고 그 쪽으로 가겠다고 했다. 은빈은 됐다며 새벽 5시에 첫 차를 타고 숙소로 가겠다고 한 뒤 전화를 끊었다. 지현은 미술 학원에서 1년에 한 번 열리는 체육대회에서 늘 앞서 달렸다. 은빈과 함께 달리기를 할 때 지현은 총소리가 끝나자마자 튀어나갔다. 은빈이 달리다 발이 걸려 넘어져도 지현은 절대 멈추는 법이 없었다. 은빈은 지현의 등을 두드리려다 등 뒤에 잔뜩 흐른 땀을 보고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지현은 한 걸음 빨랐고 그만큼 더 움직였다. 배터리가 없다는 표시가 깜빡거렸다.

은빈은 다시 버스 안으로 들어갔다. 아까 버스에 앉아 있을 때와 달리 지루한 공기가 버스 안에 감돌았다. 남자 일행들은 여전히 말없이 버스에 기대 있었다. 그들은 간간히 서로 대화를 했지만 누군가와 대화하고 교감하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혼자 있는 것처럼 무감각했다. 그들은 비교적 버스의 앞좌석에 앉아 있었다. 은빈은 그들을 지나쳤다. 남대생들은 버스의 뒤쪽에 자리 잡았다. 은빈은 버스의 중간에서 조금 뒤 쪽에 앉았다. 버스 안을 찬찬히 둘러봤다. 아까 버스 정류장에서 마주친 여자는 버스의 맨 앞좌석에 앉아 있었다. 여자는 잠을 자는 듯 고개가 옆으로 고꾸라져 있었다. 잠시 후에 기사가 콜록거리며 버스에 들어와 운전석에 앉았다. 그는 잠을 청하는 모양새였다. 남대생들이 은빈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나 누가 와도 걱정 마세요. 우리가 있으니까요. 멧돼지도 바로 제압할 수 있어요.

은빈은 웃으며 알겠다고 했다. 그들은 갓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들이었다. 첫 방학을 맞아서 고등학교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왔다고 말했다.

-설마 산 속에 갇힐 줄은 몰랐어요.

남대생들은 총 다섯 명이었다. 대부분 평범한 학생들처럼 보였다. 그들은 줄기차게 게임 이야기를 하고 축구 이야기를 했다. 그 말들을 은빈은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은빈은 앞으로 돌아앉았다. 그 때 남대생 중 한 명이 은빈의 옆자리에 와서 물었다.

-대학생이세요?

은빈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는 은빈에게 무슨 과에 다니냐고 했고 은빈은 회화과라고 했다. 그는 회화과요? 하고 되물었고 은빈은 미술대학에 다닌다고 다시 말했다. 그는 신소재공학과에 다니며 함께 온 친구들은 같은 과 동기들이라고 했다. 그 때, 뒤에서 남은 남대생들이 입으로 휘파람을 불며 은빈의 옆으로 온 남자의 어깨를 두드렸다. 은빈은 갑자기 버스에서 빠져나가고 싶었다. 은빈의 옆으로 온 남자는 친구들의 놀림이 익숙하다는 듯 대꾸하지 않고 짐짓 쑥스러운 표정으로 은빈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은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 화가가 꿈이세요?

-일종의……그렇죠, 뭐.

은빈은 그에게 구구절절하게 미래 계획을 나열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침묵이 그의 상상력을 자극한 것 같았다. 은빈은 그가 입을 열어 예술에 대한 막연한 선망과 진부한 칭찬을 하기 전에 말했다.

-전 회사에 취직할 거예요.

그는 김이 팍 샌 얼굴로 아…그렇구나, 하고 중얼거렸다. 그는 몇 번 더 나의 취미나 관심사에 대해서 물었다. 은빈은 토익 공부하는 것이 취미고 여행이 관심사라고 아무렇게나 말했다. 그는 자신도 여행을 좋아한다며 공통점이 많다는 말을 덧붙였다. 은빈은 턱을 괴고 창 밖을 바라봤다. 그는 몇 번 더 질문을 했고 짧게 대답을 했다. 그는 다시 제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은빈은 숨통이 트인 것처럼 숨을 몰아 쉬었다. 아까는 시끄럽던 남대생 무리는 조용했다. 은빈에게 말을 붙였던 남자가 조그맣게 더럽게 비싸게 구네, 하고 작게 말했다. 은빈은 그 말을 똑똑히 들었지만 못 들은 척했다. 잠시 후 그들은 다른 이야기를 했다. 은빈은 가방을 세게 끌어안았다. 화장실에 가고 싶었다.

남자 일행은 버스에 앉아 계속 아무 말이 없었다. 상황 자체를 믿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은빈은 점점 화장실이 급해졌다. 밖에 혼자 나가 수풀 속을 헤집고 다닐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버스 안에서 마냥 오줌을 참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은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남자 일행들 역시 일어나 버스 밖으로 나가려 했다.

-혹시 화장실에 가는 건가요?

그들은 흔쾌히 같이 가자고 했다. 앞좌석에서 잠들어 있던 여자는 어느 새 깨어 있었다. 그의 눈 밑에 거붓한 다크서클이 드리웠다. 여전히 말이 없었고 거머리처럼 누군가에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눈빛으로 무언가를 응시했다. 버스 기사를 깨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밖은 훨씬 쌀쌀해 가을처럼 느껴졌다.

-밤이 되니까 추워지네요.

-그러게요. 그나저나 친구분이랑 떨어져서 많이 힘드시죠?

웃기는 일에 목숨을 걸었던 남자가 말했다. 은빈은 그 말이 따뜻하게 느껴져 잠시나마 그가 했던 말들 중 일부를 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우리는 같이 있어서 다행인 것 같아요.

은빈은 지현이 자신 없이도 잘만 여행한다는 말을 하려다 말았다. 은빈은 핸드폰의 후레쉬를 켰다. 도로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산의 중심부에 있는 것처럼 나무가 우거지고 공기는 텁텁했다.

-산림원에 안 가길 잘했네요. 이렇게 자연 속에 풀들이 많은데.

은빈은 다리에 닿는 수풀을 손으로 걷어내며 말했다. 남자 일행들은 잠시 웃었다.

-아까 우리는 화장실에 한 번 갔다 온 적이 있거든요. 조금만 더 가면 쓰러져가는 나무 박스같이 생긴 건물이 나와요.

이번에는 안경 낀 남자가 말했다. 은빈은 이들과 함께 버스에 남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혼자 떨어진 것보다는 나았다. 수풀을 헤치고 가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흙 길이 나왔다. 은빈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 길로 조금 더 걸어가니 남자가 말한대로 나무 판자로 만든 기울어져 가는 네모난 상자 같은 화장실이 나왔다. 화장실이라고 하기에 민망할 정도였다. 나무 판자는 썩어 문드러졌고 문은 아예 달려있지 않았다. 밤인데다 안개가 자욱해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남자가 먼저 가라고 망을 봐주겠다고 했다. 축축한 흙을 밟고 나무 판자 쪽으로 다가갔다. 흙에서 한기가 올라와 다리가 오들오들 떨렸다. 밖에서 보는 것과 직접 들어온 것과는 상당히 달랐다.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지저분하고 어두웠다. 화장실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였다. 밖과 안을 구분하기 위해서 임시로 세워놓은 나무 벽에 지나지 않았다. 어둠이 익숙해지자 바닥에 깔아 놓은 얇은 판자 두개 사이에 검은 구멍이 보였다. 냄새가 지독했다. 은빈은 인상을 쓰고 그 위에 엉거주춤 서서 바지를 내렸다. 짧은 바지를 입어 더러운 바닥에 바지가 닿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는 소리가 잘 들렸다.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은빈은 처음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점점 소리는 커졌다. 은빈은 그대로 굳었다. 동물일 수도 있었다. 밖에 있는 남자들을 불렀다. 대답이 없었다. 은빈은 더 큰 소리로 불렀다. 조용했다. 일단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빈은 옷을 추스르고 밖으로 나갔다. 핸드폰으로 후레쉬를 켰다. 풀들이 빛을 받아 바닥에 그림자가 졌다. 나무 판자집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은빈은 소리쳐서 남자들을 불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이상했다. 은빈은 조그만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작은 들쥐였다. 은빈은 숨을 몰아 쉬고 조금 걸었다. 어둠 속에서는 어디가 어디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계속 누군가를 불렀지만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은빈은 뒤돌아섰다. 남자 두 명이 은빈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 같이 화장실에 왔던 일행이었다.

-어디 갔었어요? 한참 찾았어요.

은빈은 한숨 놓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은 대답이 없었다. 묵묵히 후레쉬를 은빈 쪽으로 비치고 있을 뿐이었다. 휴대폰의 바깥 쪽 후레쉬 옆의 불빛이 붉게 깜빡이고 있었다. 은빈은 그들과 눈이 마주쳤다. 본능적으로 다리가 움직였다. 어디로 가는 지도 몰랐다.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숨이 차고 심장이 쿵쾅댔다. 손과 발에 땀이 났다. 은빈은 어떻게든 수풀 속에서 벗어나서 버스가 있는 쪽으로 달려야 했다. 몇 미터 정도 그들이 쫓아서 뛰어오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확실하지는 않았다. 산짐승일 수도 있었다. 은빈은 아까 들어왔던 길로 뛰었다. 사방은 컴컴했다. 배터리가 없어 후레쉬가 자동으로 꺼졌다. 아무것도 없었다. 은빈은 수풀 속에 몸을 숨겼다.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핸드폰 배터리가 여전히 깜박거렸다. 새벽 3시 30분이었다. 은빈은 경찰에 전화를 걸었지만 전파가 터지지 않았다. 숨어 있다가 동이 트면 버스를 타러 가기에는 배터리가 모자랐다. 은빈은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고 걷기 시작했다. 토끼뜀을 할 때처럼 쭈구려 앉아 손으로 앞을 더듬으며 흙길을 찾아 더듬거렸다. 이슬이 맺힌 풀들이 손끝에 닿았다. 은빈은 잘못하다가 산짐승에게 물리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걱정했지만 그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산에서 나는 짐승 소리는 공포심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부엉이 소리 같기도 하고 늑대의 울음소리 같기도 한 정체모를 소리가 멀리서 울렸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쉴 새 없이 들렸다. 그렇게 더듬거리다 마침내 축축한 흙을 발견했다. 은빈은 그 길을 따라서 정처없이 걷기 시작했다. 몸이 무겁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당장이라도 쓰러져서 잠들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은빈은 어떻게든 몸을 움직였다. 칠흑 같은 어둠도 익숙해지자 앞이 조금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 발소리가 났다. 은빈은 귀가 예민해져 그 소리를 듣고 수풀에 숨었다. 추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치뜨고 자세히 보니 버스 앞좌석에서 졸고 있던 그 여자였다. 은빈은 안심이 되어 밖으로 천천히 나왔다. 여자는 은빈을 못 본 듯했다. 은빈은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화장실 찾으세요?

여자는 은빈을 발견하고 멈춰 섰다. 그다지 놀라지 않은 모양이었다. 은빈이 혼자 수풀 가운데 서 있는 상황이 여자의 입장에서 충분히 이상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모든 것을 다 설명하기에는 은빈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화장실 왔다가 길을 잃었어요. 어느 쪽으로 가야 해요?

은빈은 간신히 말했다. 여자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여자의 이목구비에서 입은 지워져 없는 것 같았다. 코도 입도 심지어 얼굴 윤곽도 흐릿했다. 오로지 눈빛만이 유일하게 제기능을 하고 있었다. 그 눈빛을 그대로 받고 서 있는 것은 지치는 일이었다. 은빈은 그가 걸어온 방향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여자를 지나쳐 걸었다. 그 때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창년.

은빈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았다. 여자의 눈빛은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될 무언가를 보는 것처럼 얼룩덜룩한 검붉은 빛깔을 띄고 있었다. 어둠 때문인지도 몰랐다. 부엉이이나 개구리 소리 같기도 했다. 은빈은 잘못들은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은빈은 저도 모르게 뭐라고요? 하고 되물었다. 여자의 눈이 화살처럼 은빈에게 쏟아졌다. 다시 찬찬히 살펴보니 그는 여자가 아니었다. 통통한 몸에 달라붙는 티셔츠를 입고 있어서 가슴이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머리만 길었을 뿐이었다. 이제 보니 그는 남자였다. 은빈은 한 대 얻어 맞은 것처럼 정신이 얼얼했다. 은빈은 그에게 반박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애초에 그가 한 말인지도 알 수 없었다. 산짐승 소리를 착각한 것일 수 있었다. 은빈은 그의 입이 움직이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오로지 그의 눈만이 은빈에게 달라붙었다. 그가 온 방향으로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가 한 말이든지 아니든지 은빈은 어서 버스로 돌아가야 했다.

은빈은 지현이었다면 어떻게 했을지 생각했다. 지현은 애초에 이런 산 속에 홀로 남아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악착같이 앞의 버스에 올라탔을 것이다. 그는 어디서든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쳤고 그에 맞게 카멜레온처럼 변해 환경에 적응했다. 지현이었다면 아마 이후에 이 여행을 ‘나를 성장하게 해 준 에피소드’ 중 하나로 꼽으며 회사 면접에서 자신의 역량으로 둔갑시켰을 것이다. 은빈은 그런 것조차 하지 못했다. 앞을 보지 않고 달리다 보니 도로가 보이기 시작했다. 뒤에서 쫓아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은빈은 버스에 올랐다. 기사는 곯아 떨어져 코를 골았다. 남자 일행들은 돌아와 있었다. 버스 안의 사람들은 모르는 척하면서 은빈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은빈은 그 시선들이 느껴졌다. 은빈이 자리에 앉았다. 금방이라도 쓰러져 잠들 것 같았다. 그러나 잠들 수 없었다. 은빈은 파우치에 눈썹칼과 미용 가위가 들어 있는 것을 기억했다. 그 두 개를 꺼내 양 손에 그러쥐었다. 뒤에서 누군가 머뭇거리며 은빈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괜찮으세요?

남대생들이었다. 은빈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손에 쥔 날카로운 칼날을 더욱 세게 잡았다. 손가락이 베어 조금 피가 나왔다. 은빈은 언제든지 목소리를 높여 소리 지를 준비를 했다. 버스 안의 시계에 빨간 글씨로 써진 4시 30분이 깜빡거렸다. 조금 있으면 해가 뜨고 아침이 된다. 은빈은 아침이 되면 달라질 것들을 떠올렸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숨을 죽였다. 남자 일행들의 시선이 은빈에게 닿았다. 은빈은 그들이 움직여 다가오는 순간 칼로 찌를 준비를 했다. 점점 동이 트는 지 사위가 밝아졌다. 은빈은 몽롱한 얼굴로 있다가 버스에 들어오는 여자로 착각했던 남자를 보고 잠에서 깼다.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들썩이는 바람에 날카로운 가위에 손바닥이 찢기고 눈썹칼은 더욱 손가락 안으로 파고들었다. 은빈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사이렌 소리처럼 크고 정확한 비명소리였다. 기사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은빈을 바라봤다. 은빈은 고개를 숙이지도 않고 고개를 똑바로 들고서 그저 오랫동안 소리를 질렀다. 아까 속으로 삼켰던 비명이 속에서부터 폭발했다. 그 누구도 은빈을 말리지 않았다. 은빈은 소리를 멈추고 가방을 쌌다. 다음 버스가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침이 되자 다시 모든 게 그대로였다. 은빈은 다음 버스에 타고 나서야 여행하는 중이었음을 깨달았다. 이른 시간이어서 새로 온 버스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숙소로 가기 위해 시내의 버스 정류장에서 내렸다. 나머지 사람들을 실은 버스가 은빈의 앞을 스쳐 지나갔다. 은빈은 숙소로 향하지 않고 터미널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은빈은 지현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버스 안 사람들의 시선에 은빈에게 쏠렸다. 은빈은 주머니 속의 칼날을 확인했다. 심장은 계속 두근거렸고 멈추지 않았다. 은빈은 버스에서 쓰러지듯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 심사평은 소설 부문 당선작 하단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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