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대 열사 추모 18주기 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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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대 열사 추모 18주기 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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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10.06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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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대 열사 추모 18주기 기념

 

18년 전 강경대 열사를 추모하며- 우리에게 남은 과제를 돌아보다
강경대 열사 추모 18주기를 맞아 1991년 4월 26일 산화한 강경대 열사의 당시 상황을 되돌아보고, 강경대 열사가 민주화 역사에 어떤 의미를 남겼는지 알아봤다.

1991년 4월 26일 그날
약 30년 동안 이어진 군사정권 속에서 당시 대학생들의 주된 투쟁목적은 학원자주화와 맞물린 ‘군사정권 퇴진’이었다. 1991년 당시 2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미중(경제 90) 동문(이하 김 동문)은 그 당시를 그렇게 기억했다. 그는 “당시에도 물가상승률보다 큰 폭으로 오르던 등록금이 큰 문제였다”며 “이외에도 재단 전입금이 아닌 등록금으로 학교 운영ㆍ시설에 투자하는 것이 많은 재학생의 반발을 샀다. 결국, 등록금 협상으로 투쟁하던 중 4월 24일 박광철 총학생회 회장이 불법 연행되었고, 이후 투쟁은 더욱 격렬해졌다”고 말했다.
1991년 4월 26일, 학원자주화와 박광철 총학생회장의 석방을 요구하며 재학생들은 인문캠 학생회관 1층에 모였다. 당시 명대신문사 기자였던 김 동문은 “취재차 갔던 그날도 학교 앞에서 학우들과 경찰이 대치하고 있었다”며 “여학우와 새내기 가릴 것 없이 모두 투쟁 했다”고 말했다. 이어 김 동문은 “경제학과 1년 후배였던 경대를 그날 아침 투쟁을 위해 모인 자리에서 마주쳤고, 그것이 내가 본 마지막 모습이었다”고 말했다.  

지난 13일부터 인문캠 학생회관 1층에서는 강경대 열사를 비롯한 9명의 열사를 추모하고 있다
김 동문은 사진촬영을 위해 전투대와 경찰이 있는 곳으로 갔지만 날아오는 돌을 맞고 민주계단(당시 학생회관 1층에서 본관으로 향하던 계단)으로 돌아왔다. 김 동문은 “그때 명대방송국에서 학우 한 명이 백골단의 무력진압으로 크게 다쳐 세브란스 병원에 옮겨졌다는 방송이 연달아 방송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학우가 경대인지 몰랐다”고 말했다. 강경대 열사는 백골단을 피하려다 붙잡혀 쇠파이프에 난타를 당했고 끝내 사망했다.

강경대 열사가 숨진 자리에 추모현판이 세워졌다

김 동문은 “이후 경대의 죽음은 연일 뉴스와 신문에 보도되었고, 전 국민의 분노를 샀다. 또 이 일이 있고난 뒤 그 당시 개강 이후에도 문제가 되었던 등록금 협상은 적정한 합의점을 찾았으며, 당시 서울시경(현 서울 서부경찰서)의 경찰서장과 현장을 지휘했던 중대장, 소대장 등이 직위 해제되고 폭행에 가담한 경찰관이 구속되었다”며 “이후 투쟁 시에도 우리 대학 학우에게는 한동안 함부로 진압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여론이 악화하면서 ‘백골단’에 대한 해체가 검토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26일의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이후 전국적으로 학생 투쟁이 번졌고 수많은 열사를 낳는 등 4ㆍ5월은 투쟁의 연속이었다”

4ㆍ5월 투쟁 중 열사들
1991년 4월 29일
강경대 열사의 죽음 앞에 청년 학생들이 앞장서서 싸울 것을 호소하며 백승희 열사 분신
1991년 5월 1일
폭력 진압의 노태우 정권에 항거하며 김영균 열사 분신
1991년 5월 3일
‘강경대 폭력살인 노태우정권 타도를 위한 결의대회’ 도중 천세용 열사 분신 후 투신
1991년 5월 8일
전민련(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김기설 열사 서강대학교에서 분신
1991년 5월 10일
노태우 정권의 ‘분신 배후 조종설’에 대한 비난 유서를 남기고 전남대학교에서 윤용하 열사 분신
1991년 5월 18일
‘강경대 열사 노제 영결식’ 도중 연세대학교 철길에서 이정순 열사 분신
1991년 5월 22일
전남대학교 병원 옥상에서 정상순 열사 분신
1991년 5월 25일
폭력진압을 한 노태우 정권 퇴진 시위중 성균관대학교 김귀정 열사 산화

그날 이후, 우리 사회는 노태우 정권이 서민경제의 악화와 군부독재 등의 문제를 일으키자 많은 이들은 ‘정권퇴진’을 외쳤다. 지금의 모습과 비교해보면 1991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도 용산 참사와 같은 폭력 진압과 언론통제, 부당한 비정규직 해고 등 사회 구조적 모순이, 학내에서는 학우들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은 학제개편과 학과 통폐합이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다.
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 사무국장 이진호(경영무역 98) 동문(이하 이 동문)은 “과거 열사의 정신이 남아있기 때문에 우리들의 복지와 환경이 보장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이 동문은 “하지만 최근 대학생은 이 시대의 지식인임에도 불구하고 사회문제에 어떤 목소리도 내지 않는다”며 우리가 사회의 주인이라는 것을 잊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 동문은 “경대의 죽음은 그 당시 사회 구조적 환경과 모순이 낳은 사건이고 그 죽음은 적지 않은 영향과 사회변화를 가져왔다”며 “그가 현재 우리 사회의 주는 시사점이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 할 때”라고 말했다.

종로구 숭인동에 있는 강경대 기념관에는 강경대 열사의 방이 있다.

한편, 이런 강경대 열사의 뜻을 알리고 계승하며, 민주화의 역사를 이어나가기 위해 매년 추모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올해도 강경대 열사 추모사업회(이하 추모사업회)는 지난 13일에 시작해 오는 26일까지 추모 행사를 진행한다. 이번 ‘18주기 추모사업’은 ▲20일- 4.19 기념 마라톤 ▲23일- 18주기 강경대 열사 추모제 ▲25ㆍ26일- 광주순례에 각각 진행한다. 추모사업회 학생주체 최수지(경제 07) 학우는 “학우들이 나라사랑ㆍ학교사랑ㆍ친구사랑을 실천한 강경대 열사를 추모하는 이 시기에 우리도 사회의 주인이 ‘나’라는 의식을 갖길 바란다”고 말했다.

서민지 기자 sophyseo@mj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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