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8호]"경대가 떠난 지 27년이 지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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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8호]"경대가 떠난 지 27년이 지나고..."
  • 곽태훈 기자
  • 승인 2018.04.3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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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을 기억하는 사람들, 그리고 우리들

지난해, 6월 항쟁을 다룬 영화 <1987>이 개봉했다. 그 영화를 통해 대한민국은 잠시나마 1987년 6월을 기억할 수 있었다. 당시 청년들은 전두환 정권의 故 박종철 군 고문살인 조작 ‧ 은폐를 규탄하고 호헌철폐를 외치며 거리로 나섰다. 그 과정에서 연세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이한열 학생이 전경이 쏜 최루탄에 맞아 목숨을 잃고 만다. 故 이한열 열사의 죽음은 항쟁이 전국적으로 번지는 결정적 계기가 됐고 이에 당시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대통령 후보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포함한 6  29선언을 발표한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1991년, 또 한 번 공권력이 자행한 폭력에 의해 젊은 청년이 목숨을 잃는다. 1991년 우리 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해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청년, 노태우 정권의 공안 통치를 우려하던 청년, 학원자주화 완전승리와 타도 노태우 정권을 외치던 학내 시위 현장에서 백골단*의 무차별적인 폭거에 의해 산화하고 만 청년, 그 청년이 바로 故 강경대 열사다. 故 강경대 열사가 세상을 떠난 지 27년이 지난 현재, 우리는 그를, 그리고 1991년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1980~1990년대의 사복경찰체포조. 이들은 일반전투경찰들과 달리 흰색 헬멧에 청색 재킷을 입었다

<1991>, 27년 전의 봄은…

1991년 봄은 ‘1991년 5월 투쟁’ 혹은 ‘분신정국’이라 불린다. 시작은 1991년 4월 29일, 전남대학교 식품영양학과 2학년생이었던 故박승희 열사가 ‘故 강경대 열사 추모 및 노태우 정권 퇴진 결의대회’ 도중 분신한 사건에서부터였다. 故 강경대 열사가 산화한 지 3일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故 박승희 열사를 필두로 시작된 불길은 금세 번졌다. 5월 1일에는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2학년생이었던 故 김영균 열사가 ‘故 강경대 열사 추모 및 공안통치 분쇄를 위한 범안 대인 결의대회’에서 분신했고, 이틀 뒤인 3일에는 경원대학교 전산과에 재학 중이던 故 천세용 열사가 분신 후 투신했다. 이후 △8일 故김기설 열사 △10일 故 윤용하 열사 △18일 故 이정순 열사, 故 김철수 열사 △22일 故 정상순 열사가 투쟁의 뜻을 이어갔다. 이 외에도 6일에는 한진중공업 노동조합 위원장으로 활동하던 故 박창수 열사가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25일에는 성균관대학교 불어불문학과에 재학 중이던 故 김귀정 열사가 ‘공안통치 민생파탄 노태우 정권퇴진을 위한 제3차 범국민대회’에 참여했다가 백골단의 강력한 진압으로 질식사했다.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경찰은 10분 동안 950발 가량의 최루탄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같은 해 8월에는 △故 손석용 열사가 대구대학교에서 분신 후 투신했다.

1991년 5월 투쟁의 도화선이 된 건 故 강경대 열사의 죽음이었다. 이는 故 박승희 열사가 남긴 유서에서 알 수 있다.

1991년 5월 투쟁의 열사들이 공통적으로 외친 건 노태우 정권의 퇴진이었다. 공안탄압을 행했기 때문이다. 당시 노태우 정권은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 결과 탄생한 여소야대 정국을 반전시키고자 야당이던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 합당을 단행했다. 그 결과 민주자유당이라는 거대여당이 구성되고 노태우 정권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쥘 수 있었다. 이후 노태우 정권은 공안정국*을 조성해 학내 학원자주화투쟁에 개입해 학생 운동권을 거세하는 작업을 거행했다. 이러한 시대상황 속에서 1991년 4월 26일, 故 강경대 열사는 500여 명의 학우들과 함께 ‘학원자주 완전승리와 노태우 정권 퇴진’을 외치며 우리 대학 교문 앞에서 전경들과 대치한다. 해당 집회에서 연락책을 맡고 있던 故 강경대 열사는 학생 진압을 위해 숨어 있던 백골단을 발견하고 이를 집회 선두에게 알리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달렸다. 그런 자신을 쫓아오는 백골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학교 담장에 올라서는 순간, 한 백골단원이 故 강경대 열사의 발목을 낚아챘고 그때부터 백골단의 무자비한 집단 구타가 시작됐다. 쇠파이프를 이용한 구타는 좀처럼 멈추지 않았고 그 구타에 의해 故 강경대 열사는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고 만다. 추후 밝혀진 그의 사인은 ‘전두부 함몰골절에 의한 뇌손상과 심장막 내출혈’. 명백히 백골단의 폭행에 의한 사망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1991년의 봄은 공권력에 의해 청년이 사망하고, 이에 분노한 또 다른 청년과 시민들이 목숨을 잃은 해였다.

*집권세력 내지 정부가 정치적 반대세력 탄압을 위해 사회질서와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발생한 것처럼 과장하여 조성한 보수적 정치 국면

1991년을 품에 안고 사는 사람들

 

▲ 사진은 2001년에 개봉한 김환태 감독 作, 다큐멘터리 <1991년 1학년>의 장면 캡처다.

1991년 봄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이 잊히지 않는 기억으로 자리한 사람들이 있다.「강경대 평전」을 지은 민중의소리 이동권 기자, 故 강경대 열사 관련 다큐멘터리 <1991년 1학년>, <내 친구 경대>를 제작한 김환태(국문 91) 감독이 그러하다.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故 강경대 열사와 같은 91학번이라는 점, 故 강경대 열사와 1991년을 기록으로 남겼지만 故 강경대 열사와는 일면식도 없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왜 故 강경대 열사와 1991년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했을까?

故 강경대 열사와 같은 해 우리 대학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한 김환태 감독은 1991년 4월 26일은 금요일이었다며 요일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집회는 낮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구로에 가야할 일이 있어 집회에는 참여하지 못하고 오후 5시경에 학생회관에서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갑자기 학교에서 방송이 울렸다. ‘어떤 학우가 최루탄에 맞아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중이니 학우들은 모여 달라’는 방송이었다. 이에 수많은 학우들이 우르르 몰려 나가 학교에서부터 연세대학교까지 구호를 외치며 걸어갔다. 1991년을 떠올리면 그 기억이 가장 강렬하게 남아 있다”며 그 날을 회고했다. 또한, “그 기억이 경대에 대한 부채감과 미안함으로 다가온다. 이는 내가 만일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경대가 아닌 내가 죽을 수도 있었겠다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그래서 경대에 대한 이야기를 작품으로 남기고자 했다”고 덧붙였다. 1991년을 ‘울분과 울먹울먹함의 연속’이라고 표현한 이동권 기자도 김환태 감독과 상황이 비슷했다. “부음을 전해 듣기 전까지 강경대라는 이름을 몰랐다. 심지어 강경대 열사의 생과 사가 바뀌던 그날 그 현장에 함께 있지도 않았다”며 말문을 연 이동권 기자는 “그럼에도「강경대 평전」을 쓴 이유는 강경대 열사의 부음을 처음 접했던 순간 때문이었다. 1991년 4월 26일 다른 시위 대오에서 ‘반미, 노태우 정권 타도’를 외치고 있던 내게 선배 한 분이 뛰어와 명지대생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렸는데, 그때 선배의 얼굴에서 피맺힌 절규를 봤다. 그 사실은 이제 한국 사회에 막 눈뜬 새내기의 가슴에도 비통한 일로 다가왔다. 1991년은 너무 많은 사람의 죽음이 있었고, 본질을 왜곡한 비판들이 난무했다. 해서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강경대 열사와 동시대를 살았던 새내기로서의 사명감 같은 게 일렁였고 무엇보다 열사의 정신을 이어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컸기에「강경대 평전」을 집필했다”고 전했다.

이들에게 있어 1991년은 단순한 옛 기억에 그치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매년 새해가 되면 故 강경대 열사 묘지를 방문한다는 김환태 감독은 “1991년에 겪었던 경험들이 지금까지 어떤 일을 하는 데 있어서 크게 작용하고 있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전혀 친분이 없던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죽음을 생각하며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아마 91학번들을 비롯해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중에는 비슷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남아있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김환태 감독의 말처럼 이동권 기자도 여전히 1991년의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었다. 이동권 기자는 “강경대 열사와는 어깨동무 한 번 해보지 못한 사이였지만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친구 같은 강력한 유대감이 머릿속에 형성됐다. 내가 현실에서 밥그릇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 분투하다 운동의 길을 선택하게 된 것도 그의 죽음과 깊게 연결돼 있다”고 밝혔다.

강경대 선배를 기억하시나요?

이처럼 1991년에 대학을 다녔던 사람들 중에는 여전히 그 시대와 故 강경대 열사를 생생히 기억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2018년 현재 대학을 다니는 학우들은 1991년을, 그리고 우리 대학 동문이기도 한 故 강경대 열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본지는 이와 관련해 지난 13일부터 19일까지 양캠 100명씩, 총 200명의 학우를 대상으로 설문을 실시했다. (그래프 참고)

故 강경대 열사에 대한 인식은 캠퍼스 간 큰 차이를 보였다. ‘강경대 열사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란 질문에 인문캠의 경우 100명 중 42명의 학우들이, 자연캠의 경우 응답오류 2건을 제외한 98명 중 97명이 ‘아니오’라고 답한 것이다. 또한, 故 강경대 열사의 죽음으로 촉발된 5월 투쟁에 관한 ‘1991년 5월 투쟁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란 질문에 대해서는, 인문캠 학우는 100명의 응답자 중 77명이, 자연캠 학우는 2건의 응답오류를 제외한 98명의 응답자 중 90명이 ‘아니오’라고 답했다.

그러나 故 강경대 열사를 모르는 학우가 다수라고 해서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전혀 없다는 건 아니다. 강경대열사추모사업회에서는 매년 강경대 열사 추모제를 진행하고 그를 기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올해 강경대열사추모사업회에 입회한 최정연(문정 18) 학우는 “올해가 강경대 열사 27주기인데 27년이 지났으면 솔직히 잊힐 수도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친구들과 얘기를 하다보면 소수긴 하지만 강경대 열사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전했다.

▲ 우리 대학 인문캠 본관 1층(좌)과 학생회관 1층(우)에 설치된 1991년 5월 투쟁 열사들을 추모하는 단상이다.

Re : Member.

우리 대학 인문캠 교문 근처에는 故 강경대 열사 추모 동판이 있다. 동판이 세워진 곳은 27년 전, 故 강경대 열사가 백골단에게 폭행을 당했던 장소다.

▲ 우리 대학 인문캠 교문과 인접한 위치에 세워져 있는 故 강경대 열사 추모 동판이다.

그를 기리는 이들은 故 강경대 열사가 남긴 열사 정신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영향을 끼친다고 입을 모은다. “학생들이 계속 문제제기를 하고 힘을 모아 저항한 것이 변곡점이 돼 사회는 발전해 왔다”는 이동권 기자, “1991년의 대학생들이 현 대학생들과 연결돼있다”는 김환태 감독, 그리고 “1991년에 투쟁했던 분들이 있었기에 조금 더 나은 환경에서 살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직도 강경대 열사가 외치던 사회 문제가 완전히 해결됐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도록 소수라도 강경대 열사를 잊지 않고 계속 기려야한다”는 최정연 학우까지. 1991년을 겪은 이도, 겪어보지 못한 이도 故 강경대 열사를 추모하며 더 나은 사회를 꿈꾸던 스무 살 청년에게 응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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