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8호]한창 봄비가 내리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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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8호]한창 봄비가 내리던 날
  • 김종현 칼럼니스트
  • 승인 2018.04.3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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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을 하고 있었다. 며칠 전까지 갑작스레 기온이 올라 이른 여름인가 싶게 더웠는데, 그 날 즈음은 며칠째 내리는 봄비로 꽤 쌀쌀한 때였다. 밖에선 차가운 비가 내리고 차 안은 그보다 온도가 높으니 앞 유리에 김이 서리기 시작했다. 아무려나 신경 안 쓰고 달리다 보니 나중엔 온통 뿌옇게 되어서 앞이 보이질 않게 됐다. 김은 외기와 내기의 온도 차로 생긴 물방울이라서, 늘 하듯이 앞유리창 쪽 송풍구로 에어컨을 틀어 찬 바람을 내보냈다. 곧바로 김이 걷히면서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는데, 계속 그대로 가려니까 에어컨 바람 때문에 으슬으슬 추워진 것이다. 사실 김 서림을 제거할 땐 굳이 낮은 온도의 공기를 내보내지 않아도 된다. 차량 에어컨은 제습 기능도 있고 따듯한 바람이 김을 증발시키기 때문에 온도가 높아도 된다. 송풍 온도를 높여 시야를 확보하고 따듯하게 운전할 수 있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동승자가 있었고, 김 서림을 막겠다며 아무 생각 없이 찬 바람을 틀었으면 그 사람도 추워했을까. 이어서 그가 에어컨을 끄자고 하면 따듯한 바람을 생각하지 못하는 동안 김 때문에 운전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하느라 옥신각신했을까. 운전에 방해되는데 그걸 못 참느냐고 한마디를 하게 될까.

그런 일은 살면서 너무 흔하다. 서로의 상태, 온도 차를 생각지 못한 채 더 옳은 것을 주장하며 상대가 그르다고 책망하는 경우들. 보통의 생활에서도 그렇고 인터넷이나 SNS 사용 중에도 빈번히 마주친다. 나와 다른 누군가를 잘못됐다고 규정하면서 벌어지는 갈등들은 지금도 여러 소셜미디어의 타임라인을 잠식한다.

꽤 오랫동안 좋아라 하는 비유가 있다. 사람은 제각각 다른 모양의 소나무 같다는 것. 내륙의 소나무는 비옥하고 평평한 땅에서 마음껏 양분을 빨아들이며 곧게 자란다. 하지만 바닷가 기암절벽에 위태롭게 뿌리 내린 소나무는 들이치는 바닷바람과 모진 태풍을 맞아가며 바스러지는 바위를 단단히 움켜쥐고 자라느라 몸이 이리 뒤틀리고 저리 뒤틀린 묘한 모양이 된다.

거의 모든 사람은 자기만의 바다를 앞에 두고 남들이 모르는 절벽 위 바위에 한 줌의 희망으로 매달려 하루하루 자라난다. 늘 평화로웠던 누구라도 어느 때든 그 바다와 낭떠러지 끄트머리를 만나는 날이 온다. 그런 곳에서 성장하며 만들어진 비틀리고 구부러진 자신의 모습이 불만족스러우면 너른 구릉의 솔숲에서 자란 곧은 소나무와 자주 비교하게 된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완벽히 충족되는 환경은 없으며, 누구에게도 꿈꾸어보지 않은 먼 땅이 없지 않다. 곧은 소나무는 질곡으로 화려한 맵시를 갖게 된 해송을 보며 밋밋한데다 멀대같이 두텁기만 한 자신을 탓할 수 있다.

해송에겐 해송의 삶이, 내륙의 소나무에겐 그에 맞는 삶이 자기만의 개성 담긴 현재를 만들어주고 정체성을 부여하게 해준다. 중요한 건 그런 자신의 모습이다. 비록 척박한 생장이었지만 그에 뿌리내려 지금의 나를 만들어낸 나 자신, 그런 나의 모습은 자체로서 하나의 완성본이며 독보적으로 가치 있는 고유의 의미를 지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누구는 삐딱하고 누구는 고집이 세고 누구는 버럭질이 잦고 누구는 눈물이 많다. 누구는 강건하고 누구는 유약하며 누구는 잔꾀가 많고 누구는 걱정이 많다. 구부렸으므로 바람을 흘려 꺾이지 않아 살아남았고, 뒤틀었으므로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다.

전통 목조 가옥을 지을 때, 유능한 대목장은 산에서 만난 나무의 모양을 보고 그 모양 대로를 살려 집의 심미에 풍요로움을 더한다고 했던가. 자신의 지금 모습은 자신이라는 집에 가장 알맞은 최적의 역사다. 온갖 비바람과 위험에서 자신을 지금껏 살아남게 해준 매번 고마운 선택들의 결과다. 그러므로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아름답다는 수식어를 붙일만 하다.

서로 다르기에 생기는 차이는 옳고 그름으로 나눌 수 없다. 두 사람의 안전한 운전을 위해 적당한 온도의 바람을 찾아내는 것처럼, 내가 나의 원하는 바를 알고 더불어 상대의 체온을 살피면 서로가 함께할 수 있는 공간을 찾을 수 있다. 애정을 담은 한 번의 시선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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