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6호]즐거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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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6호]즐거운 일
  • 김종현 칼럼니스트
  • 승인 2018.03.2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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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면허증 갱신이 턱 밑까지 다다랐다. 고지서가 오고 전화까지 받은 뒤에도 한동안 일 핑계로 미적거렸다. 더 이상 뒤로 미룰 날이 남아 있지 않게 된 다음에야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권 사진 두 장 때문이다. 새 면허증을 받으려면 최근 6개월 이내에 찍은 사진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평범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보통 사람에게 그런 게 있을 리가. 사진을 찍으려면 집 근처 사진관을 검색하고, 가서 사진을 찍고, 한동안 시간을 죽이며 기다려야 한다. 정작 면허증 발급은 인근 면허시험장으로 가서 시력검사를 하고 새 면허증을 발급 받는 게 전부다. 그깟 35mm x 45mm 사이즈 인화지 두 장을 출력해가는 일이 전 과정의 절반을 넘는다. 첫 단계부터 귀찮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하지만 이번에도 미루면 면허가 취소되기 때문에 일단 집 주변 사진관을 검색했다. 요즘엔 옛날처럼 ‘사진관’이란 상호를 좀체 찾을 수가 없다. 그 자리를 채운 건 스튜디오다. 사진관과 스튜디오 사이에는 피처폰과 스마트폰 사이만큼의 눈금들이 매겨져 있다. 어쨌든 가장 가까운 사진관을 찾아갔다.

예상대로, 모든 게 예상과 달랐다. 묵직한 삼각대 대신 DSLR을 손에 든 사진사는 높은 의자에 반쯤 걸터 앉아 연신 셔터를 눌러 댔다. 나는 삼면으로 된 접이식 반사판 앞에 앉아 그의 외침에 따라 착실하게 움직여야 했다. 자 턱을 조금만 드세요~ 츨걱! 눈 조금 더 크게 뜹니다 ~ 츨걱! 웃으세요 웃으세요~ 츨걱! 경쾌하고 웃음기 머금은 말투의 그는 흡사 패션 사진 전문가 같았다.

의자에 앉는 순간부터 일어날 때까지 1분도 안 걸렸다. 사진사는 본인이 직접 포토샵으로 사진을 보정했다. 카운터 안 그의 자리에서 보이는 작업 화면은 카운터 밖에 앉은 내 앞의 모니터에도 그대로 공유됐다.

그 때 상당한 손놀림을 봤다. 나는 오랫동안 컴퓨터 그래픽 일러스트를 해왔고 그 때문에 몇 가지의 그래픽 프로그램을 능숙하게 다룬다. 당연히 단축키 사용도 익숙해서 상당한 속도를 낸다. 그런데 내 눈 앞에서 그가 보여준 속도는 내가 아는 감각보다 훨씬 빨랐다. 이 정도면 거의 유튜브에 올라온 동영상 교재처럼 몇 배속으로 압축한 수준에 가까웠다. 나의 칭찬에 돌아온 그의 쾌활한 답은 소박했다. “그냥 일하다 보니까 손님들이 원하고 필요해서요.”

어쩌면 그의 단축키 누르는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을 지 모른다. 항상 하던 정해진 루틴이 있었거나, 특별히 고민할 필요 없는 과정에 숙련돼 있었을 수 있다. 그런 것이든 아니든 단지 제 마음 가는 대로 익힌 무엇 때문에 일이 빛날 수 있었을 것이다. 한가지 일을 파고든다는 것의 위대함. 지루하고 긴 시간이 될 줄 알았는데 사진을 받아 나가기까지 모든 과정은 채 10분이 걸리지 않았다. 내가 지금까지 알던 사진관에서는 이런 스튜디오의 마법이 일어나지 않았다.

어떤 사진을 골라 보정할 지 묻는 그의 질문에 나는 그가 본 내 인상에 맞춰 고를 것을 주문했다. 살짝 웃는 표정의 사진이 골라졌고, 작은 잡티와 점 몇 개 그리고 실금 같은 주름들이 지워졌다. 그 결과 그 사진은 분명 나였지만 좀 더 밝은 인상의 내가 됐다. 비록 얼굴의 주인은 나지만 내 얼굴사진이 쓰이는 건 나보다 남의 눈 앞에서 더 잦다. 이번에 찍은 사진은 은행원이나 교통경찰관에게 보여주게 될 것이다. 그러니 기왕이면 밝은 표정이 낫다. 내 사진은 그의 호쾌한 손길 덕분에 가장 용도에 걸맞는 결과물이 됐고, 시간을 쪼개 사는 현대인의 기호에 맞게 짧은 시간 안에 전달됐다.

종종 사람들은 일을 즐기라고 한다.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하기보단, 자신이 즐기는 걸 일 삼으라고 한다. 긍정적인 직업관이 희망의 돌파구가 될 거라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고 싶어하던 일도 즐길 수 없을 때가 있고, 해야 할 일이 싫을 때도 많다. 현실이 그렇게 말처럼 쉬웠다면 애초에 일을 즐기라는 말 같은 건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중요한 건 즐길 수 있는 일을 찾는 게 아닐 수도 있다. 자신이 하는 일을 효과적으로 하는 방법부터 숙련하는 게 먼저인 경우도 있다. 그러면 일이 즐거워지기도 한다. 그는 내가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부터 나갈 때까지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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