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5호]언어의 모양
상태바
[1035호]언어의 모양
  • 김종현 칼럼니스트
  • 승인 2018.03.12 09: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청소부 엘라이자는 말을 할 수 없다. 하지만 우주연구소의 실험실 관리자인 직장 상사는 그에게 그만 수다를 떨라고 한다. 집에선 남편과 별 대화를 나누지 않는 단짝 데릴라가 엘라이자에게 끊임없이 말을 하기 때문이다. 엘라이자는 청소부, 여자 그리고 장애인. 이것이 그가 처한 현실이다. 스스로 자신의 삶을 꾸려 나가며 옆집 노인에게 친절을 베푸는 건강한 엘라이자이지만, 그가 속한 사회에서 그를 규정하는 것은 직업과 성별과 신체다.

영화 <사랑의 모양 Shape of Water. 2018>은 목소리를 낼 수 없지만 그럼에도 누구보다 열심히 이야기를 하고 있는 여성이 주인공이다. 60년대 냉전 시기, 국가간 폭력의 균형이 곧 평화의 균형을 이루는 모순된 세계 속에서 힘과 권력의 계단은 그 세계를 지탱하는 구조물이 된다. 힘은 힘에 의해 받쳐지고 폭력의 공기는 낙숫물처럼 아래로 흘러 내려간다. 기예르모 감독은 인종, 직업, 성별, 나이, 성적 지향 등 수많은 차별의 교차점들을 두 시간 내내 훑는다. 옳음을 전유한 대의가 어떻게 위계에 맞춰 폭력을 작동시키는지 그린다.

그 맨 아래에 엘라이자가 있다. 그는 동료에게 벙어리라고 힐난을 받거나, 오물이나 치우는 사람이란 소릴 듣는다. 심지어 성추행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한마디로 인격을 무시당한다. 수화로 의사표현을 할 수 있지만 보통 사람들의 제대로 된 ‘말’로 취급 받지 못하는 언어를 가진 발언자다.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그를 흑인인 데릴라보다 더 위태롭게 만든다. 전형적인 악한인 보스가 그에게 원하는 것은 인간의 감정표현이 아니라 짐승도 낼 수 있는 비명이다. 그가 어떤 생각과 감정을 갖고 있는지 관심 있어 하는 주류계층은 없다.

그런 엘라이자보다 더 낮은 곳에 누군가 있다. 남미에서 포획해온 괴생명체인 남자인어는 아예 이해되지 않을 소리를 내는 짐승으로 간주된다. 감정 반응이나 교류능력이 전무하다고 정의된다. 어떠한 인격도 부정당하는 개체다. 그러니까 엘라이자가 그를 구하려 했던 것은 일종의 동질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타인이 받는 부당한 대우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과 동일시 할 수 있는 것. 즉 공감이 엘라이자로 하여금 용기 있는 행동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용기가 자신을 구원한다.

더 이상 낮은 곳이 없어 보이는 위치의 한 인간이 자신보다 더한 처지에 빠진 누군가와 손을 잡는 것은 때로 그가 갖고자 하는 세상의 전부다. 인간은 늘 함께 할 누군가를 필요로 하지만, 그 누군가는 목소리나 수화로 연결되는 이상의 대화가 가능해야 한다. 입을 통해 나오는 말이 아닌 심장이 뛰어 건네는 고동이 서로를 존재 자체로 받아들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자신도 하나의 존재가 될 수 있다.

지금 우리사회에서 특별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MeToo운동을 필두로 기존의 세계를 이루고 있던 강고한 벽들이 허물어지는 중이다. 그 기저엔 체제의 유지를 이유로 폭력을 정당화하는 힘의 위계에 대한 저항의지가 있다. 당장엔 여성의 권익을 위한 항쟁의 모습을 띠고 있지만 궁극적으론 모두가 존재 그 자체로 인정받기 위한 움직임이다.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이들에게 말 할 수 있는 권리를 복원한다는 점에서 이 움직임은 일종의 언어다. 체제 고유의 언어를 익숙하게 사용할 수 있는 혜택이 주어지지 않은 이들에게도 안전한 발언권이 생기는 것이기에 이는 곧 평등의 추구다.

영화 속 약체 엘라이자가 받는 대우는 여지없이 현실의 반영이다. 최약체가 아니더라도 위계질서가 세계를 지탱하는 공간에선 누구나 불평등을 느낀다. 정점에 있다고 여기는 이라 하더라도 자신만이 누리는 좌표란 영원할 수 없기에 불안과 불행의 공간에 놓여진다. 따라서 평등의 추구는 개인에겐 행복의 추구이면서 모두에겐 평화의 추구다. 이를 이끄는 것은 불평등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의 공유다. 나 하나는 힘이 없더라도 자신보다 더 낮은 곳에서 고통 받는 이들과 언어를 공유하라는 시대적 주문이 한창이다. 손을 내밀고 일으켜 세우는 언어. 전에는 들리지 않았지만 분명히 존재해 왔던 어떤 모양을 소리 내고 있다. 모두가 귀를 기울일 때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 인문캠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거북골로 34 (명지대학교) 학생회관 2층
  • 자연캠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명지로 116 학생회관 2층
  • 대표전화 : 02-300-1750~1(인문캠) 031-330-6111(자연캠)
  • 팩스 : 02-300-1752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승환
  • 제호 : 명대신문
  • 창간일 : 1954년 11월
  • 발행인 : 유병진
  • 편집인 : 송재일
  • 편집장 : 한지유(정외 21)
  • 디자인·인쇄 : 중앙일보M&P
  • - 명대신문의 모든 콘텐츠(영상, 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명대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jupress@hanmail.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