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4호(개강호)] 가난한 시골 소년에서 육군 대장에 이르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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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4호(개강호)] 가난한 시골 소년에서 육군 대장에 이르기까지…
  • 권민서 기자
  • 승인 2018.03.0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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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육군 대장 이철휘(전자 71) 동문을 만나다.

 

명지대에 오기까지

 

6.25 전쟁의 아픔이 가득했던 1954년, 이철휘 동문은 38선이 있는 경기도 북부지방 포천에서 태어났다. 1년 내내 쌀이 한 톨도 안 떨어지고 끼니를 때울 수 있는 집이 거의 없는, 20여 채의 집들이 모인 동네에서 자랐다. 그 중에서도 당시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분기에 한 번씩 내는 기성회비를 한 차례도 제대로 내 본적이 없었을 정도로 가난했다.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가방을 싸게 해서 돈 가져오라고 집으로 보내는 일을 수도 없이 겪던 학창시절, 대학교 진학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런 내가 어떻게 대학을 가게 되었냐. 이게 정말 미스테리에요. 그런데 당시에는 뭐가 있었냐면, 학력고사라고 현재의 수능과 같은 시험이 있었어요. 우리 때는 예비고사라고 했죠. 여기에 붙은 사람만이 대학교 진학 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는데, 학교 선생님들이 전교에서 상위 20~30% 안에 드는 학생들은 학교의 명예를 위해 전부 이 시험을 보게 했어요. 저도 그래서 이 시험을 보긴 했는데 사실 대학을 가려는 생각은 전혀 없었고, 빨리 군대나 다녀와서 취직하려고 했어요.” 그런 그에게 명지대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당시 문교부(교육부)에서 대학교 정원의 일정 비율 이상을 예비고사에 붙은 사람들로 채워야하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는데, 마침 명지대의 교무처장님이 저희 지역인 포천 출신이셨어요. 정동준 교수님이라고, 후에 명지전문대학의 초대 학장을 맡으신 분이에요. 그 분이 교무처장 하시며 포천에도 연락을 하셨는데, 제가 담임선생님의 추천을 받고 명지대 장학생으로 들어오게 된 거예요.”

그러나, 그렇게 대학을 진학한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서울에서 먹고 자는 것을 해결해야 하는데 이것이 쉽지 않았기에 학교를 그만 두고 취직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기도 했다. “서울시에서 하는 초등학교 준교사 자격증 시험을 보고 학교를 그만 두려고 정동준 교수님께 말씀드렸어요. 그런데 교수님이 지금 학교를 그만 두면 이후에 더 어려워진다며, 어렵더라도 대학은 졸업하자고 만류하셨어요. 그래서 고민하던 중에 ROTC 모집공고가 제 눈앞에 보인 거예요.” ROTC 후보생으로 지원을 하고 군대 복무 기간 연장을 하면 그 기간만큼 장학금을 준다는 것이었는데, 이 제도는 그에게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는 동아줄이 되었다. 남은 대학교 2년을 장학금 받는 조건으로, 군 생활 2년을 추가해서 총 4년의 군 생활을 하기로 하고 등록금 내고도 생활비가 될 정도의 장학금을 받았다. “그렇게 학교를 졸업하고 ROTC 소위가 되어 군대에 갔는데 먹여주고 재워주는 등 모든 의식주를 다 해결해주면서 봉급도 주고, 30명 이상의 부하도 있으니까 군대가 정말 신났어요. 어린 시절에 놀 거리가 없으니까 군인들 훈련하는 것을 구경하고 동네 아이들이랑 병정놀이를 하던, 딱 그 마인드로 임하니까 군대생활이 체질에 맞더라고요. 사람이 재밌는 일을 하면 신나잖아요. 그래서 윗사람들이나 동료들이 잘한다고 칭찬하기도 하고, 군대 체질이라고 놀리기도 하며 그렇게 즐겁게 복무했죠.”

 

군인으로서의 37년

 

1975년 첫 군인 생활을 시작했을 때부터 2011년 전역까지, 37년의 세월을 군인으로 지내며 수많은 일을 겪었다. 처음 소위로 입대했을 때는 병사들과 뛰어다니고 훈련받고, 다 모아놓고 영화 본 얘기도 하고, 봉급을 모아서 병사들에게 빵을 사주기도 하며 즐겁게 생활했다. “중소위 때는 그저 재밌게 보냈어요. 국가와 민족을 위해 한 목숨 바치겠다는 이런 비장한 마음이 아니라 그냥 군대가 좋았는데, 서서히 시간이 지나면서 군에 대해서 생각도 깊어지고 나름의 철학도 가지게 됐어요.”

중대장으로 근무할 당시엔 병사 두 명이 폭약을 버터로 착각하고 밥에 비벼먹는 사건이 터졌다. 그는 이 사건을 통해서 실패를 발판 삼아 성공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교훈을 얻었다고 말한다. “전 군 생활하며 잘못하거나 실수한 걸 감추지 않아요. 지휘관을 했을 때도 난 이래서 실패했으니까 너희들은 이러면 안 된다는 식으로 터놓고 장병들에게 얘기했어요. 지금 생각해도 실패사례를 숨기지 않은 건 잘 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폭약 버터 사건은 제 불찰로 인해서 일어난 사건인데, 시범식 교육을 하기 위해 준비한 폭약의 위력이 너무 강해 반쯤 잘라낸 걸 병사들이 버터로 착각하고 밥에 비벼 먹었어요. 70~80년도니까 강원도 사람들은 버터가 어떻게 생긴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다행히 대대장님이 병사들이 먹은 버터를 가져와보라고 지시하신 덕분에 진상이 밝혀지면서 병사들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결국 제 잘못으로 인해 일어난 사건이에요. 폭약을 잘라서 쓰면 안 되는 규정을 위반한 것, 그래서 남은 폭약을 용기 있게 상부에 보고하지 못한 것, 마지막으로 쓰러진 병사들이 뭘 먹었는지 제대로 확인을 안 하고 버터를 먹더라는 타인의 보고만 받고 끝난 것, 이 모두가 제 불찰인거죠. 그래도 어린 나이에 그렇게 하지 말아야겠다는 교훈을 실패 경험을 통해 얻었어요.” 육군 대장으로 임명되고 약 1년 후, 천안함 폭침 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건 등의 큰 사건이 발생했다. “천안함 사건 때는 함정을 먼저 공격했으면 동시다발적으로 후방지역에 대한 복합적인 공격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을 하고, 책임지역의 혼란이 없도록 대비를 철저히 했죠. 한편으로는 천안함의 군인들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간절한 기도도 했어요. 연평도 사건도 마찬가지로, 우리 부대의 책임지역에서 맡은 임무를 철저히 수행하며 정말 전쟁이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대비를 했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떠오르네요.”

이렇듯 많은 일이 있던 군대에서 그는 자신만의 가치관과 철학을 정립했다. 긍정적 사고와 적극적 행동, 그리고 나를 중심으로 상하좌우를 아우르는 리더십, 모두 군 생활에서 겪은 경험과 철학을 통해 정립된 정의들이다. “군 생활하며 기쁜 일, 슬픈 일 많이 있었는데 늘 잊지 않았던 것은 군대는 정신 교육의 도장이라는 거였어요. 하나의 질서 아래에서 모두가 새로운 인생을 경험하고, 또 새로운 사회생활로 가는 과정인거죠. 그래서 올바른 인성을 갖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많이 강조 했습니다.” 그는 대부분 육군사관학교 출신이 많았던 육군 대장을 학군 출신이 하게 된, 대한민국에 몇 없는 진급절차를 밟았다. 그렇게 될 수 있는 원동력이 바로 이것이었다고 이철휘 동문은 말한다. “우선 첫 번째는 운이 좋아서, 전 하나님을 믿으니까 하나님 은혜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기 때문에 그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지 않았나 싶어요. 그리고 두 번째 이유를 꼽자면 긍정적인 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는 연습과 모든 일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면서 윗사람과 아랫사람, 옆의 동료들까지 모두 아우르는 네 가지 방향의 리더십 실천이 좋은 결과를 가져온 것 같아요.”

 

전역 이후, 현재

 

배움에 대해 갈망을 갖고 군 생활동안에도 틈틈이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여 용인대 명예 행정학 박사, 명지대 대학원 경영학 박사 과정 수료도 했다. 지난 2013년에는 군대의 경험을 군인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젊은 학생들에게 올바른 인생관을 알려주기 위해 사단법인 긍정의힘교육문화연구소를 설립했다. “적극적인 행동과 긍정적인 사고가 인생의 제일 가는 철학이에요. 그런데, 이와 같은 모든 요소를 포괄한 대전제는 바로 역지사지에요. 만남이 반복되는 인생의 역사에서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며 배려하는 것, 리더십의 기본이기도 하죠.”

그는 앞으로 이루고 싶은 단기 목표와 장기 목표를 꼽았다. 현재 더불어민주당 포천 가평 지역 당협위원장에 도전하는데, 그곳에서 정치를 하며 이기주의 정치를 타파하고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고 낙후된 지역을 발전시키는 것이 단기목표다. 이어서 궁극적으로는 모든 사람들에게 긍정의 힘을 널리 전파하는 것이 장기목표라고 말했다.

이철휘 동문은 명지대는 본인에게 있어서 ‘노아의 방주’와 같다고 정의한다. “제겐 명지대가 노아의 방주와 같아요. 명지대에 입학한 후에 ROTC가 되어 군인의 길을 걷고, 종교도 갖게 되고, 제 인생이 바뀌었어요. 故 유상근 설립자님과 故 김우종 교목님은 제 인생의 멘토였습니다. 그래서 명지대는 20대 초반부터 제 인생을 좌우한 절대적인 구원의 방주라고 믿고 싶어요.” 그는 후배들에게 네 가지의 말을 전해주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제가 후배들에게 강의를 할 때 항상 이야기하는 주제가 네 개 있어요. 첫 번째는 꿈을 가지라는 거예요. 꿈 없이 그저 남들 흘러가는 대로 가는 사람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는 다시 한 번 말하는 거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거예요. 꿈을 갖고, 할 수 있는 대로 된다고 생각하면 길은 열립니다. 세 번째는 적극적인 행동이에요. 제가 보기에 우리 명지대 학생들은 너무 얌전한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열정을 갖고 적극적으로 행동하기와 함께 타인과의 관계에서 역지사지의 자세로 소통하는 것, 이게 마지막이에요. 앞서 말했듯 명지대는 저에게 있어서 인생의 가장 큰 터닝 포인트이기 때문에 우리 대학을 나온 후배들이 정말 잘 됐으면 좋겠습니다. 명지대라는 울타리 안에서 서로 힘이 될 수 있도록 저도 노력할게요.”

이철휘 동문이 전역한 후 새로운 인생의 전환기, 그의 현재를 응원하며 앞날에 긍정적인 힘이 가득 하기를 기원해본다.

▲ 학군후보생 시절 이철휘 동문
▲ 대위 진급 신고를 하는 이철휘 동문 (오른쪽)
▲ 중위 시절 (앞 줄 두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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