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백마문화상 소설 부문 가작 - 한티의 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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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백마문화상 소설 부문 가작 - 한티의 멋
  • 조은비(문창 15) 학우
  • 승인 2017.12.03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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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티 형에 대한 생각을 다시 시작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랜 일이 아니었다. 계기는 아주 사소했다. 길을 걷다 우연히 노래 한 곡을 들었다. 그게 다였다. 그 때부터 나는 한티 형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생각과 함께 착각도 늘었다. 형이,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정도만은 알 자격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육하원칙 중에서 네 가지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자꾸만 궁금했고 상상을 했다. 우연히 들었던 그 노래를 매일같이 들었다. 명곡으로 꼽히는 노래도 아니었다. 언젠가 반짝 떴다 스쳐 지나갔을 한 남자 아이돌 그룹의 노래였다. 그것도 미니앨범 이집 즈음 되는 것의 사번 트랙 정도. 한티 형은 주옥같은 노래들이 많다며 나에게 그 앨범을 선물했었다. 당시 나는 그 앨범을 중고 물품을 거래하는 사이트에 오천 원을 받고 팔아 넘겼다.

우연히 그 노래를 들었던 날 밤에는 심하게 스스로에 취해 있었다. 노래를 다시 들으며 나는 팔을 감싸 쥐었다. 노래가 특별하게 느껴졌다. 예전에는 느낄 수 없던 무언가가 들리는 듯 했다. 보통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이 노래를 듣고 한티 형을 기억해낼 수 있었는지. 그보다 어떻게 한티 형을 까마득히 잊고 살 수 있었는지. 어쩌면 이런 걸 인연이라 부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맥주를 꺼냈다. 한티 형과 인연이 아니라면, 노래를 틀었던 카페 주인과 혹은 알바생과 운명적인 만남을 할지도 모르겠다며 노래의 볼륨을 높였다. 그 날의 일기장에 적힌 내용은 다음 날 아침에 갈기갈기 찢어 휴지통에 버렸다.

음악과 술이 있다면 사람은 감상에 빠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는 쓴다. 까맣게 잊고 살던 사람이 찰나의 순간으로 단번에 기억나는 일은 참으로 진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나는 지금 운명의 길로 나아가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한 카페를 지나던 길에 한 노래를 들은 것이, 그 노래가 하필 한티 형이 좋아하던 노래였던 것이, 결국에 우연이고 운명이고 자시고 할 게 아니었다는 것을 며칠이 지나고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혜성처럼 떠올랐다가 유성처럼 반짝하고 사라졌다던ㅡ매체의 홍보문구에 의하면 그렇다ㅡ그 아이돌 그룹이 십여 년이 지난 지금 다시 뭉쳐 노래를 낸다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그들의 옛 노래는 역주행을 하여 인기 100순위 안에 올라 있던 것이었고, 나는 괜히 일기장을 썼다 찢기를 반복하는 소모적인 일을 도모하고 있던 것이었다. 검색해 본 아이돌 그룹의 기사 사진에는 세월의 흔적이 엿보이는 남자들 몇 명이 주먹을 쥐고 카메라를 향해 웃고 있었다. 우연이나 인연은 턱도 없었다. 나를 위한 노래라며 추앙받아 마땅하다 생각했던 그 노래를 더 이상 듣지 않기로 했다. 그래 이 노래에는 감동이 없는 게 맞았다.

음악 폴더에서 노래를 지웠지만, 한티 형에 대한 생각이 함께 끊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자꾸 생각을 하다 보니 한티 형이 불과 하루 전에 만나고 온 사람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물론 생각을 넘어 행동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라고 말하기엔 목구멍이 답답한 게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이실직고하자면 나는 한티 형을 찾기 위해 탈퇴했던 SNS도 다시 가입했다. 검색은 물론, 친구의 친구의 친구 목록까지 뒤져봤으나 형의 계정을 찾을 수는 없었다. 다시 생각해도 괜한 짓이었다. 한티 형은 이런 걸 만들어서 관리하고 글을 쓰고 사진을 올릴 사람이 아니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티 형은 그랬다. 한티 형은 제 멋에 사는 사람이었다. 형의 과거는 충분히 빛났다. 내가 형의 현재를 궁금해 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지금은 그 빛을 얼마나 절제하고 얼마만큼 발산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는지, 그게 궁금할 뿐이었다.

한티 형을 형이라고 부른 것은 처음부터였다. 그러니까, 신입생 환영회 날 옆자리에 앉은 그 순간부터였다. 한티 형은 층이 많이 난 단발머리를 하고서 잔에 담긴 맥주를 단번에 마셨다. 아마 나는 한티 형이 맥주를 마시는 모습에 활짝, 마음의 문을 열었던 것 같다. 그 때만 해도 나는 자칭 순수의 아이콘이며 젖내 풍기는 어린 소년이었음에 틀림이 없었으니까. 한티 형은 재수를 했냐는 누군가의 질문에 고개를 갸우뚱하게 꺾었다.

재수는 아니고 그냥 백수.

나는 그게 왜 그렇게 웃겼는지 모르겠다. 지금 생각하면 한티 형에겐 절대 개그나 유머가 아니었을 말이었다. 나는 한티 형의 말을 듣자마자 웃기 시작했고,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곤란했을 주위 사람들은 나를 따라 덩달아 잠시 웃었다. 이야기는 바로 다른 화제로 넘어갔고 한티 형은 앞에 놓인 마카로니 과자를 집어먹었다.

환영회는 시간이 갈수록 재미가 없어졌다. 신입생을 환영하는 자리는 어느새 복학생을 환영하는 자리가 되어 있었다. 신이 난 선배들만 저들끼리 큰 소리로 떠들어댔고, 신입생들은 눈치를 보며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나는 사실 그 자리가 썩 불쾌하지는 않았다. 동기들과 신환회에 대한 얘기를 할 때마다 나는 몇 개의 장면들을 떠올리곤 했는데, 그 장면들에는 모두 한티 형이 있었다. 두 볼이 붉어지다 못해 이마까지 발그레해진 것이 약간 취기가 오른 듯 보였다. 한티 형은 수많은 갈색 마카로니 과자 속에서 초록색, 주황색, 분홍색 과자들을 골라내어 자신의 앞에 늘어놓았다. 형은 두 손을 살짝 들며 작게 외쳤다. 유레카!

하다못해 과자까지도 감동을 주는데.

한티 형은 모은 과자를 한쪽 손바닥에 쓸어 담았다. 그것을 한입에 털어 넣는 모습을 보며 나는 형에게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형은 나를 한참동안이나 가만히 바라보았다. 입 안에 있는 과자를 씹느라 형의 입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그 때 나는 형이 입 안에 있는 과자를 모두 삼킬 때까지 기다려야 했는데, 그 일그러지는 입술조차 독특해보였다. 형은 한티, 라는 두 글자를 내뱉고는 내 빈 소주잔에 맥주를 채웠다.

나는 그 날이 지나고도 몇 번 더 한티 형과 마주쳤다. 형은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였다. 함께 있는 사람이 남자인 것이 3할이라면, 여자와 함께 있는 날들은 7할이었다. 그만큼 한티 형의 주변엔 여자들이 많았다. 그 때의 나는 아주 잠시간 묘한 우울감에 빠져들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서야 나는 비로소 그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매우 충격적이고 아주 감동적인 사실 하나로 인해. 교양을 같이 듣던 여자 동기와의 평범한 대화에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동기는 한티 형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고, 나는 애써 평범하게 대꾸를 하고 있었다. 동기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한티 언니와 밥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 문장의 포인트는 동기도 아니었고, 흐르는 물도 아니었으며, 밥을 먹으러 간다는 것도 아니었다. ‘언니’라는 단어는 내게 다른 데시벨로 다가왔다. 그러니까 한티 형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

한티 형이 남자인 줄 알았다고 말하자 동기들은 모두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내 안목을 비난했다. 미안하다고 말하는 내게 한티 형은 괜찮다고 말하며 웃었다. 나는 토익 시험을 준비하며 fascinate이라는 단어를 접할 때마다 종종 한티 형이 손을 내젓는 이 장면을 떠올리곤 했다. 매료된다는 감정이 무슨 감정인지 나는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 때 나는 한티 형에게 그러면 계속 형이라고 불러도 되냐고 물었다. ㅡ당신에게 나 하나쯤은 특별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요? 라고 그 날의 일기장에 적혀 있다.ㅡ 한티 형은 멋대로, 하며 전공 책을 펼쳤다. 나는 그 때, 앞으로 인생을 멋대로 살아야겠다는 굳은 결의를 다졌다.

강의가 없는 시간은 늘 테라스의 철제 의자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덥거나 추운 것도 개의치 않았다. 어쩌면 대학 생활의 로망은 잔디밭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 나의 모교에는 잔디밭이 없었다. 그 테라스가 나름의 로망을 채워 줄 유일한 장소였다. 여름엔 뜨겁고 겨울엔 차가운 철제 의자에 앉아 운동장을 내려다보는 일은 훗날 추억거리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청춘아-하며 회상할 수 있는 장면 하나쯤은 만들어놔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나는 대학을 다니는 내내 테라스를 애용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테라스에 앉지 못해 울상을 지었다. 나의 잦은 건의 끝에 테라스에는 천막이 생겼고, 결국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나는 그곳에서 청춘을 완성할 수 있었다.

본관 앞의 테라스에 앉아 운동장을 내려다보면 가끔 한티 형이 있었다. 형은 동아리 하나를 들었다. 대학교 이름 앞에 '레알'자만 붙인 아주 촌스러운 이름의 축구 동아리였다. 스포츠로 머리를 짧게 깎은 한티 형은 다른 남학생들과 섞여 있어도 눈에 잘 띄지 않았다. 나는 당시 유행하던 드라마 주인공의 머리를 따라하겠다고 한창 머리를 기르고 있던 참이었다. 한티 형의 머리는 내 것보다 훨씬 짧았다. 하지만 테라스에 앉은 나는 한티 형의 작은 머리통을 잘도 찾아냈다. 이쯤 되면 어떤 것이 먼저였는지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한티 형이 사라지고 난 후에도 나는 테라스에 앉아 남은 대학 생활을 보냈다는 것이다.

 

12월이 끝나가고 있었다. 예수의 탄신일은 무미건조하게 끝이 났다. 대학을 졸업한지도 거의 십년이었다. 영원할 줄 알았던 이십대는 꿈처럼 지나갔다. 텔레비전에서는 설 특집 프로그램이라며 어린 나이의 아이돌 가수들이 나와서 노래를 부르고 게임을 했다. 그 사이에는 한티 형이 좋아했던 그룹의 멤버들도 있었다. 세월의 흔적은 빗겨갈 수 없듯이, 아무리 시술의 힘을 빌렸다 하더라도 그들은 수많은 아이돌들 틈에서 너무나도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그들의 모습에 퍽 억울함이 느껴졌다. 이질적인 사람이라는 말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동질적인 사람이라는 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내가 뭐라고 나이 든 아이돌의 질적 판단을 하고 있을까. 불혹을 바라보는 내가 뭐라고. 그럼에도 그들이 이질적이라는 생각은 여전히 멈추질 않았다. 그 뒤로 그 아이돌이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나는 채널을 돌렸다. 적응이 안 된다는 게 이유라면 이유였다.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정장을 멋있게 차려 입고서는 깜빡 잊고 삼선 슬리퍼를 신고 나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한티 형을 찾는 일은 진작 그만두었다. 대신 그 아이돌의 옛 앨범을 찾기 시작했다. 뚜렷한 이유는 없었다. 한티 형이 선물해줬던 앨범을 다시 찾는다고 해서 형을 만날 수 있을 거란 터무니없는 희망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다시 만났을 때 적어도 하나쯤의 공유물이 있다면 나쁘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그 아이돌이 이질적으로 보이지 않던 시절이 궁금했다. 그 시절을 찾고 싶었다. 나는 중고 사이트의 구매해요 게시판에 매일같이 글을 올렸다. 며칠의 고생 끝에 나는 오천 원에 팔아버린 앨범을 오만 원에 다시 살 수 있었다. 앨범의 한 귀퉁이는 흠집이 크게 나 있었고 색도 바래있었다. 낡은 표지 위에 새겨진 그들의 얼굴을 보자 한티 형 생각이 간절해졌다. 한티 형이 마치 그들의 멤버였던 것처럼 형의 목소리와 얼굴이 점점 더 또렷하게 떠올랐다. 나이 든 아이돌의 젊은 시절은 여전히 내게 이질적이었고, 나는 더욱 한티 형이 보고 싶어졌다.

 

한티 형에게는 머슴아, 사내자식 등의 별명이 따라다녔다. 그 말마따나 당시 여대생이라면 응당 갖춰야 할 것들로 통용되던 것은 한티 형에게 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한티 형이 무조건 남자처럼 행세하고 다니던 것은 아니었다. 형은 치마를 입기도 했고, 화장을 할 때도 있었다. 그러면 형은 많은 주목을 받곤 했다. 형은 어떤 반응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하루는 한티 형과 단둘이 밥을 먹었다. 한티 형이 치마를 입고 화장을 했던 날이었다. 형이 시킨 고기 반 김치 반은 나의 왕돈가스보다 먼저 나왔다. 형은 먼저 밥을 먹기 시작했다. 나는 음식이 나오기까지 기다려주지 않은 것을 못내 서운해 했었다. 잠시였지만 나는 말없이 형의 밥 먹는 모습을 관찰했다. 한티 형이 치장을 하고 단장한 모습은 예쁘지 않았다. 흔한 새내기 여학생들처럼 풋풋하고 산뜻해보이지도 않았다. 나는 돈가스를 받아 자리에 앉았다. 형은 내 식판의 옥수수샐러드를 향해 숟가락을 뻗었다.

형 요즘 연애해요?

나는 문득 질문했다.

왜?

그냥 오늘 꾸미고 왔길래.

옷은 뭐 멋대로 입는 거지. 연애랑 상관없이.

그래서 연애는요? 해요?

한티 형은 나이프로 자르지도 않은 내 돈가스를 입으로 베어 물었다. 그리고 마치 단무지를 깨물어 먹듯 간단하게 대답했다.

하는 것 같기도.

한티 형의 연애 소식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연애 상대가 누군지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한티 형은 연애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유연하게 대답을 피했다. 궁금증이 풀리지 않자 사람들은 연애 상대가 어쩌면 여자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흘리고 다녔다. 그 얘기를 들은 한티 형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멋대로 생각하라 그래. 멋대로 하라는 말은 한티 형이 자주 쓰는 말이었다. 한티 형의 ‘멋대로’는 다른 이들의 ‘마음대로’와 같았다. 그러니까 한티 형의 ‘멋대로’에는 부정적인 뉘앙스도 악의도 없었다. 가끔씩 형을 처음 본 사람들은 형의 멋대로 하세요, 라는 말에 얼굴이 붉어지고 푸르러지곤 할 때도 있었다. 한티 형의 ‘멋대로’는 스스로에 대한 주문이기도 했고, 상대를 위한 배려이기도 했다. 내게 ‘멋대로’는 형만의 것이 되었다. 마치 그 말이 형을 위해 만들어진 말이라고 느껴지기까지 했다. 형은 시도 때도 없이 멋대로, 라고 말했고 나는 그 말이 좋았다. 하지만 그 덕에 형은 선배들에게 미움을 받은 적도 있었다.

한티야, 이름 뜻이 뭐냐?

질문이 나오자 모두들 관심을 갖고 형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한티 형은 어깨를 으쓱하며 글쎄요, 할 뿐이었다. 노란 분당선에는 한티라는 이름의 역이 있다는 말도 나왔다. 형은 한티역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바가지머리를 한 선배가 코를 먹어대며 웃었다.

부모님이 한티 역에서 그렇고 그런 밤을 보냈을 지 또 아냐.

나는 뜨악했고, 으악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반면에 한티 형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형은 아주 담담하게 그랬을 지도요, 했다. 바가지 선배는 동조를 바라는 팔꿈치로 나를 찔렀다. 한티 형은 뒷목을 잡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나는 바가지의 팔꿈치와 한티 형의 뒷목 사이에서 어쭙잖게 웃었다. 썰렁한 분위기 속에서 누군가 이름의 진짜 뜻이 뭐냐고 한 번 더 물었다. 한티 형은 멋대로 생각하는 거죠 뭐, 하며 자리를 떴다. 그게 끝이었다. 바가지 선배는 그 날 이후로 군대를 가기 전까지 나만 보면 바가지를 긁어댔었다.

한티 형의 이름 뜻을 지금도 여전히 모르는 나는 홧에버, 왓에벌, 와레벌, 혀를 굴리며 발음을 여러 번 해보았다. 아이돌이라고 부를 수 있을 지조차 의문이 드는 아이돌 그룹의 새로운 신곡은 음원 차트 5위를 기록했다. 나는 그룹의 이름을 인터넷에 검색해 기사들을 읽었다. 그 중에는 그 아이돌이 재결합하게 된 과정 등의 인터뷰를 실어 놓은 기사도 있었다. 그들은 소속사도 없었고, 도와주는 스태프들도 없었다. 자신들의 힘으로 곡을 만들고 가사를 쓰고, 안무를 짰다. 방송국에 직접 찾아가 홍보를 했고, 퇴짜를 맞는 곤혹도 감수하며 그룹을 다시 만들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재결합에 마냥 응원과 성원만이 쏟아지진 않았다. 나이 먹고 추태라는 댓글도 종종 보였고, 외모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꽝이라는 댓글도 쉽지 않게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활짝 웃고 있는 사진 속 그들은 불혹을 맞이하기 직전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그들은 마음대로 옷을 입었고, 멋대로 화장을 했다. Whatever. 그들과 참으로 잘 어울리는 노래 제목이었다.

한티 형이 좋아했던 멤버는 그 아이돌 그룹의 멤버 중에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었다. 형에게 쟤가, 어디가, 왜, 그렇게, 좋아요? 하고 물으면 형은 멋있잖아, 하고 대답했다. 한티 형이 여자 동기들과 남자 아이돌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는 장면을 보고 있자면, 그 순간을 부정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이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한티 형을 아는 사람에게 보여준다면, 그 사람은 합성이 아니냐고 물어볼 것이 분명했다. 한티 형에겐 아이돌보다는 격조 있는 뮤지션이 어울렸고, 후크송보다는 분위기 있는 인디 음악과 열정적인 힙합이 어울렸다. 그 때의 내 생각은 그랬다.

노래 속에는 whatever라는 단어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가사는 한 줄 한 줄이 모두 이어지지 않았다. 단순한 말들을 이어놓은 의미 없는 문장들에 불과해 보였다. 그들만의 색깔을 톡톡히 보여준다는 것이 이 노래의 홍보문구였다. 이 홍보문구에 따르면 그들은 예전부터 이러한 스타일을 유지해왔다는 뜻일 것이었다. 아이돌 앨범을 사고 팬사인회를 따라다니던 한티 형의 모습을 어색해하던 십여 년 전의 나는 한 번도 그들의 노래를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었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우연이니 운명이니 떠들어대는 와중에도 노래를 집중해서 들어본 적은 없었다. 어렵게 다시 구한 앨범을 꺼내 음악을 재생시켰다. 음질은 좋지 않았지만 멜로디와 가사는 또렷이 들렸다. 수록된 노래들은 후크송도 아니었고, 나름대로의 분위기도 있었고 열정도 있었다. 가사는 역시 솜사탕을 얘기하다 커튼으로 마무리되는 의미 모를 문장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어쩌면 그 어떤 음악보다도 이들의 노래가 한티 형에게는 가장 잘 어울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은 예나 지금이나 뭐든 상관없는 사람이었을 테니까. 한티 형이 어깨를 으쓱하며 Whatever하고 말하는 듯한 장면이 눈앞에 그려졌다.

 

자유의지로 글을 쓸 수 있었던 초등학생 때부터 일기를 썼다. 이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일기를 쓰고 찢는 일을 반복했다. 십여 년 전의 나는 가끔 소설을 쓰기도 했다. 내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읽히면 세상은 큰 파장을 일으킬 것이라 생각한 시절이 있었다. 상상 속에서 사람들은 내 이야기를 읽으며 울고 웃었고, 세상은 나를 어디서든 필요로 했다. 나는 군중 앞에서 상을 받고 멋들어진 말로 수상 소감을 했다. 해피엔딩이 당연한 결말인 세상이 될 때까지 글을 쓸게요. 한티 형에게 소설을 보여준 날이 있었다. 그 다음 날 나는 다시는 소설을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일기를 쓰고 찢는 일로 만족하기로 했다. 상처를 받은 어린 짐생은 현실을 알아가는 법이었다.

네가 쓴 소설은 뭐랄까 너무 뻔하고 진부하고 클리셰적이야. 무엇보다 재미가 없어. 겉치레만 잔뜩이고. 이것 봐. 문장에는 허세가 가득하잖아. 등장하는 인물은 하나같이 도도하고 외로워. 게다가 특별하고 이상적이기까지 해. 그럼에도 결말은 뭐 하나 와 닿는 것이 없잖아. 열린 결말이라고 해서 멋있는 게 아니야.

한티 형은 솔직했다. 그럼에도 그 때의 나는 형이 문학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의 나는 내 실력과 재능에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나는 장차 세상을 바꿀 소설가가 될 사람이었다. 우습다고 생각하며 가방에 소설을 정리해 넣었다. 한티 형은 소설 속 인물에 대해 질문을 덧붙였다. 나는 구구절절 대답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 그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처음엔 그런 인물이 아니었죠. 근데 나도 몰랐는데, 걔가 알고 보니 그런 애였더라구요.

한티 형은 나를 잠시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멋대로 써, 하며 자리를 떴다. 그 뒤로 나는 멋대로 소설을 쓰는 일을 그만두었다. 후에 한동안은 한티 형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애써 피해 다녀야 했다.

내가 한티 형에게 연애 감정을 품고 있었다고 단정 짓게 된 날은 그로부터 꽤 시간이 지난 후였다. 한티 형과 비로소 연락을 하지 않게 되었을 때였다. 형이,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하고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게 되었을 때였다. 하지만 그로부터 더욱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에야 다시 생각해보면, 그것을 연애 감정이라고 단순하게 정의를 내려버리기에는 말이 품지 못한 감정들이 너무 억울해질지도 몰랐다.

테라스에 앉아 감성에 빠지는 나날을 보냈던 나는 스스로가 누군가에게 매료되었다가 헤어 나오는 그 과정에 깊이 빠져있었다. 사랑에도 종류가 다양하다는 것을 깨닫기에, 그 시절은 숱한 파도 같은 날들이었다. 나는 한티 형을 좋아했지만 군대에서 보낸 2년 동안 형에게 한 번도 전화를 걸지 않았다. 같은 내무반 사람들에게도 한티 형의 사진만은 보여주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형을 마음에 들어 하기라도 할까 싶은 그런 마음이 아니었다. 창피하다고 말하기에는 과했고, 부끄럽다고 말하기에는 모자랐다. 다른 누군가에게 한 번도 이러한 마음을 말해본 적이 없었다. 형을 향한 마음이 무엇이었는지 표현하기에 이 세상의 언어는 너무도 부족하고 편협했다. 분명한 건 나는 점점 형에게 바라는 게 많아졌다는 거였다. 한티 형은 너무 꾸밈이 많았고, 또 너무 꾸밈이 없었다.

형, 머리 좀 길러 봐요. 그러면 예쁠 것 같아.

하루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안경 좀 벗어 봐요. 그러면 눈이 좀 커지잖아.

또 하루는 이렇게 말했다.

형, 이 빨간 가디건 좀 갖다 버려요.

다른 동기가 한티 형의 옷차림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을 엿듣고 따라 말한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형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하는 말투로 이렇게 대답했다

뭔 상관이야, 내 좆대로 입는 거지.

 

아이디는 실명으로 적어야 했는데 나와 이름이 같은 사람은 많았다. 이름 옆에 숫자 2를 붙여도 사용할 수 없는 아이디라는 경고 문구가 다시 떴다. 숫자 3을 붙이자 사용 가능한 아이디라는 파란 글씨가 떠올랐다. 나는 이름 옆에 3을 붙이고서야 팬카페에 가입할 수 있었다. 카페의 회원들은 모두 이름 옆에 숫자를 붙이고 글을 게시하고 댓글을 달았다. 어떤 사람은 제2의 사람이 되었고, 어떤 사람은 제16의 사람이 되었다. 사람들은 카페에 가입하기 위해서라면 몇 번째 사람이 되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물론 아무 숫자도 붙이지 않은 이름들도 있긴 했다. 발 빠른 사람이거나, 흔치 않은 성이나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한티 형의 이름이라면 뒤따르는 그 누구도 없이 독자적으로 존재할 법 했다.

팬카페에는 여러 개의 게시판이 마련되어 있었다. 팬들이 서로 친목을 다질 수 있는 게시판도 있었고, 아이돌의 사진 따위들을 올릴 수 있는 게시판이 있었다. 심지어는 아이돌이 직접 글을 쓸 수 있는 곳도 있었다. 이곳의 글은 정회원이 되어야만 읽을 수 있었다. 가입한지 얼마 되지 않은 나는 게시판에 접근 권한이 없다는 알림창 위에서 마우스를 휘저을 뿐이었다. 등업을 하려면 아이돌에 대한 퀴즈를 풀어야 했는데, 문제를 모조리 틀린 나는 등업을 하지 못했다. 카페에서 한티 형의 이름을 찾아내는 일 또한 쉬운 것이 아니었다. 회원들 목록은 카페의 관리자만 볼 수 있었다. 나는 우선 등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티 형이 카페에 가입을 했다는 보장을 할 수도 없었고, 등업을 한다고 해서 한티 형을 찾아낼 수 있다는 확신도 없었다. 나는 여전히 그 나이 든 아이돌들의 노래와 춤사위가 전부 이상하고 어색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퀴즈를 풀고 등업을 하는 일밖에 없었다. 지금으로서 한티 형에게 다시 가까워질 수 있는 길은, 겨우 아이돌의 데뷔 년도를 알고 그들의 생년월일을 외우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게라도 해야 뭐라도 한 듯한 느낌이 들 것 같았다.

한티 형이 내 삶에서 없어지게 된 것은 마지막 학기를 앞두고 있던 시점이었다. 없어졌다는 말을 쓰는 게 가장 맞을 것 같다. 사라졌다고 말하기엔, 한티 형이 자의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을 나는 두 눈으로 보지 못했다. 혼자서 만나고 멀어졌던 관계였음이 틀림없었기에, 헤어졌다는 단어를 쓰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애증의 가방 끈을 놓아버리듯 나는 한티 형과의 연락을 끊어버렸다. 형의 입장에서는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아니 사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 때의 나는 내심 형이 섭섭하고 사무치길 바랐다. 바람이 무색하게도 한티 형에게는 한 통의 연락도 오지 않았다. 나는 소심했고 찌질했고 구질구질했다.

내가 보는 관계보다 남들이 보는 관계가 더 중요했던 때가 있었다. 한티 형을 좋아하던 시절이었다. 내가 그를 연애 감정으로서 사랑했는지는 아직까지도 형용할 수 없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나는 누군가에게 들킬 것이 염려되어 형을 좋아하지 않으려 애썼던 게 사실이었다. 한티 형과 걸을 때면 따라오는 사람들의 시선이 싫었고, 뒷말들이 두려웠다. 그들은 한티 형의 짧은 머리를 싫어했고, 테 없는 안경을 이상해했고, 빨간 가디건을 혐오했다. 나도 다르지 않았다. 형, 좋아해요. 하고 말하는 내 모습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것이 되었다. 나는 한티 형을 내게서 없애기 위한 노력을 했다.

형과의 연락이 끊어지고 난 후에 비로소 나는 연애를 했다. 매일 5교시 즈음에 테라스에 앉아 시간을 보내던 여자애였다. 걔는 머리가 길었고, 색이 있는 렌즈를 꼈고, 예쁜 청재킷을 입었다. 그리고 조금 후에 한티 형이 정말로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프랑스로 유학을 갔다는 소문도 있었고, 봉사를 하러 아프리카로 떠났다는 말도 있었다. 그 소식을 들은 나는 여자애와 헤어졌다. 해가 바뀌어 나는 졸업을 했고, 한티 형을 길에서조차 마주치지 못한 채 몇 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에는 성시경의 ‘넌 감동이었어’를 입에 달고 살았다. 마카로니 과자를 색색별로 골라놓고 유레카를 외치며 감동을 받는 한티 형을 줄기차게 떠올렸다. 포장마차에 앉아 어묵 탕을 하나 시켜놓고 소주 한 병도 비우지 못한 채로 온 감동을 다해 울었다. 그리고 한티 형은 정말로 내게서 없어져 갔다. 세상에 예쁘고 감동적인 사람은 참으로 많았다. 수년이 지난 지금에야 한티 형은 다시 나타났지만 어디에서도 형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수소문을 해서 찾은 정보라고는 하나였다. 대학을 다닐 당시에, 내가 머리가 길고 렌즈를 낀 여자애와 짧은 연애를 할 당시에, 형은 여행을 다녀왔던 것이었다. 화려한 유럽도 아니었고, 가까운 아시아도 아니었다. 국기도 선뜻 떠오르지 않는 모로코라는 곳에 가서 형은 사랑의 찬가를 불러댔다. ㅡ물론 사실 여부는 전혀 알 수 없다.ㅡ 나는 한티 형이 과연 히잡을 썼을지 쓰지 않았을지 궁금했다. 한티 형이라면 멋대로 쓰지 않았을 수도 있었고, 멋있게 쓰고 돌아다녔을 수도 있었다.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기에 나는 모로코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더 많은 상상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티 형은 여름에 학사모를 쓰고 학교를 졸업했다고 들었다. 그 이후로 한티 형과 연락을 지속하는 사람들은 누구도 없었다.

 

한티역 2번 출구로 나와서 직진하다가 은행 앞에서 좌회전. 나는 입으로 되뇌면서 걸어갔다. 팬미팅이 있는 날이었다. 선착순 입장이라는 말에 새벽바람을 맞으며 집에서 나왔다. 일주일 전에는 화보 촬영을 하는 곳에 찾아갔다. 열흘 전에는 사인회에 갔었다. 나는 언제나 멀찍이 서서 구경하는 사람들 틈에 끼어 있었다. 나와 나이대가 비슷한 남자 아이돌을 따라 다니는 일이라니. 시도 때도 없이 회의감이 드는 일이었다. 이 기분을 느끼는 일은 점점 힘에 버거웠고, 사람들의 시선은 덤으로 따라왔다. 한티 형을 찾을 때까지는 이 노릇을 해야 했다. 형은 눈에 띄는 사람이었기에, 마주치기만 하면 바로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자부했다. 그 마음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형은 어떤 행사에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형이 특유의 빛을 잃었을 리가 없었다. 형은 어디서고 멋대로 멋을 부리며 다닐 사람이었다. 아직까지 찾지 못한 것은 한티 형이 더 이상 이 아이돌 그룹에 관심이 없다는 말을 뜻할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면 남는 것은 절망뿐이었다.

반나절 내내 칼바람을 맞으며 기다렸다. 나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여자들이 핫팩을 쥐어주었다. 저들 틈에 한티 형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한티 형을 몰라볼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한티 형은 저렇게 평범한 사람들 틈에서, 평범한 옷을 입고, 평범한 핫팩을 쥐고, 평범한 담요를 두르고, 평범하게 대화를 나눌 사람이 아니었다. 12월의 마지막 날이라며 불혹의 아이돌은 팬들에게 줄 선물을 하나씩 준비했다. 나는 89번째 좌석에 앉아 선물을 풀어보았다. 선물은 그들의 캐리커쳐가 그려진 담요와 핫팩이었다. 순간 나는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매우 불편해졌다. 누군가를 찾는 시늉을 했다. 일부러 핸드폰을 들여다봤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선물 상자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 내려놓았다.

아저씨도 오빠들 팬이에요?

옆에 앉은 학생이 말을 걸었다. 중학생인지 고등학생인지 가늠할 수는 없었다.

내가 무슨 아저씨니? 나 쟤들보다 어려.

포스터를 가리키며 말하는 나를 보며 학생은 여유롭게 웃었다. 그러시구나.

아아, 나는 누굴 좀 찾으러 왔어. 조카 놈이 공부는 안 하고 말이야.

말이 끝나자 어색한 침묵은 길어졌다. 학생은 고개를 두어 번 끄덕거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웅성거리고 시끄러운 장내 안에서 나는 홀로 수치심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다.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어린 아이에 불과한데 그냥 사실대로 대답하고 끝내면 될 것을 나는 무엇 때문에 거짓말을 하고, 또 숨기고. 나는 역시나 변함이 없었다. 한티 형을 찾는 나의 수고로움은 또 물을 먹어버렸다.

이 오빠가 내 최애예요.

잠시간의 침묵 뒤에 학생은 다시 말을 걸었다. 무슨 말이냐는 듯한 표정을 짓자 학생은, 최고로 애정한다구요 하며 사진 속 누군가를 가리켰다. 그 사진은 나에게도 익숙한 사진이었다. 유일하게 갖고 있는 오 만원짜리 앨범의 표지 사진이었다. 학생이 가리킨 사람은 빨간색 재킷을 입고 초록색 바지를 입은 촌스러운 남자였다. 한티 형이 가장 좋아했던 멤버이기도 했다. 그 어디에 내놓아도 튀지 않을 평범한 이 남자는 노래도 춤도 가장 못 췄다.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어 보이는 이 사람은 늘 무대에서 땀을 가장 많이 흘렸다. 이런 사람을 한티 형은 애정했다. 애정한다라는 말은 표준어도 아닌데, 어린 애들이 만들어낸 말일 뿐인데, 왜 이렇게 벅차오르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 나는 한티 형을 최고로 애정했음에 그 어떤 부정도 할 수가 없었다.

왜 애정해?

다들 왜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는데, 좋은 걸 어떡해요. 좋으니까 좋은 거지.

사진에서 눈을 떼고 학생의 얼굴로 시선을 옮기려는 순간 장내의 불이 꺼지고 무대의 조명이 켜졌다. 학생의 표정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세 시간 동안의 팬미팅과 공연 동안 나는 한티 형을 찾아내지 못했다. 처음으로 공연을 집중해서 보았다. 공연의 마지막에는 프린트로 시작해서 침대로 끝나는 가사의 신곡을 처음으로 선보이기도 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 이제는 그 이상한 음악에 중독이 된 것 같았다. 어쩌면 솜사탕으로 시작해서 커튼으로 끝나던 그 노래를 들었을 때부터였을지도 몰랐다. 나는 앵콜을 외치는 사람들 틈에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 땀을 비 오듯 흘려대던 남자는 숨을 고르며 마이크를 잡았다. 쉬어버린 그의 목소리는 형편없이 갈라져 나왔다. 사람들은 박수를 쳐댔다. 그는 세 시간의 공연동안 노래를 부를 때 외에는 거의 처음으로 말을 하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새해에는 좀 더 멋대로, 멋있게 살기로 해요.

나는 순간 한티 형과 함께 있는 기분이 들었다. 형의 웃음소리가 아주 오랜만에 다시 생각이 났다. 나의 새해는 몇 시간 후면 찾아올 터였고, 무대에 있는 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재회한 남자 아이돌 그룹과 함께 올해의 마지막 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아이돌이었음에 틀림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은 한티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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