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이 흐르며 삶 속에 동화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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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이 흐르며 삶 속에 동화되리
  • 곽태훈
  • 승인 2017.12.03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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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빙(流氷) 석창우(전기 75) 화백, 힘찬 화풍에 담긴 그의 삶

서예크로키의 창시자이자 국내 최초의 의수화가 석창우 화백. 그는 1991년 전라북도 서예대전 입선을 시작으로 수없이 많은 작품과 퍼포먼스를 통해 미술계에 기념비적인 족적을 남기고 있다. 최근에는 2,250m 길이의 화선지에 구약성서를 필사하는 작업을 하며 세상에 도전의 가치를 역설한 그는 지금도 도전을 이어가는 중이다. 쉽지 않은 길을 걸어가면서도 즐거움을 느끼고 매사에 감사하다는 그. 종강을 앞둔 현 시점에서 삶을 반추해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석창우 동문을 만나 삶에 대한 그의 철학을 들어봤다.

붓을 쥐기까지
그가 처음부터 화가의 길을 걸은 것은 아니었다. 1955년에 태어난 그는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우리나라를 고스란히 겪으며 자라왔다. 먹고 살기 바쁜 시대를 지나고 있던 20대 청년에게는 꿈이라는 걸 생 각할 겨를이 없었다. “꿈보다 그 당시는 우리나라가 못 사는 시기다 보니까 부모들 생각이나, 사회적 분위기가 공업계를 가게 되면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다는 식이었거든요. 그래서 저 같은 경우는 공업 고등학교, 공업전문학교, 공업대학교 이렇게 갔어요. 그런 의미로 전 기공학과는 제 의지와 상관없이 그냥 간 거예요.” 비록 자의로 선택한 직업은 아니었지만, 그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다. 입사 초기 한 달은 취직한 회사에 살다시피 했다. 건물 전체의 전기시설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일요일에도 쉬지 않고 출근해 회의실부터 화장실까지 전기가 어떻게 돼 있는지 샅샅이 살 폈다. 그렇게 전기시설 구조를 완전히 본인의 것으로 만들었다. “책임자의 위치에 있다 보니까 일단 내가 모든 걸 알아야 업무를 사람들에게 시키더라도 정확히 시킬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웃 음).” 일을 열심히 하면서도 학업은 놓지 않았다. 주간에는 회사를 다녔고, 야간대학을 다니며 학업을 이어갔다. 뭐든지 하게 되면 최선을 다하고자 한 성격 탓이었다. 그렇게 그는 전기기술자로 무탈하게 자리를 잡아가는 듯 했다. 그러나 서른이 되던 해, 일이 터졌다. 1984년 10월 29일, 다니던 회사에서 전기점검을 하던 도중 22,900V의 고압 전류에 감전되는 사고를 겪은 것이다. 그 사고로 양팔과 왼발가락 중 일부를 잃었다. 너무도 끔찍했던 사고를 그는 담담히 회고했다. “보통 전기 관련 일을 하게 되면, 감전될 확률이 드물지만 있긴 있거든요. 그러니까 전기 관련 일을 하는 다른 사람이 사고를 당하던지 내가 사고를 당하던지 하는 건데, 그 당시 내가 사고를 당하게 된 것 뿐이 에요. 중요한 건 그 다음이에요. 보통 22,900V에 감전되면 양팔뿐만 아니라 양다리까지 나가거나 아니면 목숨을 잃고 그러는데 저 같은 경우는 팔만 절단이 됐거든요. 발가락도 두 개나 잃긴 했지만, 이런 건 걷는 데 지장이 없고. 그러니까 이렇게 되면 정말 감사하게 다친 거예 요. 만약 제가 다리까지 없었다면 굉장히 불편했을 거예요. 어차피 누군가는 다칠 일이었는데 그 확률이 저한테 왔다는 거, 그리고 다치는 과정에서 좋게 다쳤다는 거. 그런 생각에 감사하다는 마음이 컸어요.” 순식간에 직장과 신체의 일부마저 잃었지만 그는 낙담하지 않았다. 당시 슬하에 있던 두 자녀가 눈에 밟혔기 때문이다. “사고 당시 둘째가 태어난 지 한 달 반밖에 되지 않았어요. 아이들이 어렸을 때 다쳤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 어요. 아이들이 커가면서 아무것도 안하는 아빠의 이미지보다는 뭔 가 하나라도 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할 거리를 찾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첫째 아들놈이 제게 그림을 그려달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때 그림을 그려준 게 계기가 돼서 그 쪽에 입문하게 된 거죠.” 하지만 처음 시작은 막막했다. 일반 화실에서는 양팔이 없는 그를 잘 받아주지 않았다. 계속 거절당하다가 먹으로 하는 그림은 색깔 하나만 있으면 되니까 가능하겠다는 생각에 서예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만나게 된 게 처제와 안면이 있던 원광대학교 여태명 교수였다. 첫 만남은 쉽지 않았다. “사실 서예 쪽이 그림보다 더 힘들어요. 정밀하고 정교하고 딱 구성이 완전히 지어져야 하는 작업인 데다가 덧칠도 못하니까요. 그런데 팔도 없는 사람이 그걸 가르쳐달라고 하니까 여태명 선생도 암담 했나보더라고요. 그렇다고 아예 안면이 없는 사람도 아니니까 선뜻 대답을 못하셨어요.” 이에, 그는 여태명 교수에게 “그럼 내가 포기할 때까지만 가르쳐달라”는 제안을 했고 여태명 교수의 승낙을 얻어 냈다. 그렇게 한 달을 열심히 배운 결과, 여태명 교수는 그에게 “이제 본격적으로 해봅시다”는 말을 건넸다. 그의 인생에 있어 중요한 스승, 여태명 교수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일반적인 서예 선생들한테 배우게 되면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접할 기회가 비교적 적은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여태명 선생은 달랐어요. 자유자(비장애인)들이 하는 걸 방해를 안 해요. 도와주고. 만약에 제가 뭔가 배우고 싶은 게 있는데 자기가 못 가르쳐 줄 경우, 그 분야는 이런 선생이 괜찮다고 소개해주고 본인이 겪었던 것 중에 괜찮은 게 있다 싶으면 거기 가서 배워보라고 하는 식이에요. 그러다 보니까 제가 작업할 수 있는 폭이 확 넓어지는 거죠.” 이처럼 여태명 교수는 그에게 있어 다양한 방식으로 붓을 쥘 수 있도록 도와준 은인이었다. 
 

붓을 잡으며
좋은 인연을 만난 것도 있지만, 양팔의 부재는 그 자체로 그가 스 스로 넘어야 할 큰 산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의수로 그리는 걸 고집했다. 입으로 그릴 수도, 발을 이용해 그릴 수도 있었는데 말이 다. “TV를 봤더니 입으로 그리는 사람도 있고, 또 발로 그리는 사람 도 있더라고요. 그런데 당시에 그걸 보면서 나는 의수로 그려야겠다 는 생각을 했어요. 남들이 하는 걸 따라하는 건 싫었거든요. 실제로 입으로 해봤더니 큰 작업을 못해서 그렇지 금방 그릴 수 있었어요. 발도 마찬가지로 균형을 잡고 하다보면 자유자들이 손으로 하는 걸 금방 따라가더라고요. 그런데 이런 작업은 붓 끝의 감각이 체감이 안 되더라고요”라는 게 그 이유였다. 의수로 그림을 그리는 건 몸 전체를 움직여야하기 때문에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하루 종일 연습에 몰두했다. 아침 먹고 나면 그림을 그리고, 점심 먹을 때 잠시 쉬었다가 다시 그리고, 저녁 먹고 자기 전까지 그림 그리다 자는 일을 10년 동안 반복했다.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사고 이후 본인만의 시간이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다치고 나니까 좋은 점이 뭐냐면 가깝게 지내던 술 친구들이 다 없어지더라고요. 그러니까 술 먹던 그 시간들이 오로지 나만의 시간이 되는 거예요. 24시간이 거의 내 시간이 되니까 그림 그리는 것에만 몰두할 수 있게 됐어요.” 그 결과, 그는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었다. 자유자들에게도 힘든 작업인 서예와 크로키를 융합시킨 것이다. 크로키는 보통 5분, 3분, 1분 30초 이내로 그려야하기에 상당한 집중력과 정확한 붓질이 생명이다. 그런데 왜 하필 크로키일까? “언젠가 누드크로키를 본 적이 있는데, 누드모델이 움직이는 게 삼라만상을 표현하는 거 같더라고요. 나무도 되고, 동물도 되고, 산도 되고. 그래서 서예로 표현하기에 적합한 영역이라고 생각했어요. 흔히 팔이 없으니까 빨리 그려야하는 크로키는 힘들다고 생각을 해요. 그런데 이게 오히려 장점이 돼요. 손 있는 사람하고 같은 걸 그려도 저는 몸을 써야 되기 때문에 선의 질이 다르게 나와요.” 그래서일까. 그가 그리는 크로키는 유독 힘차다. 그는 단순히 작품만 내놓는 게 아니라 퍼포먼스도 병행한다. 마치 생방송처럼 작품을 그리는 과정을 관객들과 공유하는 것이다. 이는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다. 가진 에너지를 정해진 시간 안에 몽땅 다 쏟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번 퍼포먼스를 하고 나면 다음날 은 제대로 걷지도 못할 정도로 기가 빠지고, 일주일동안 몸살을 앓을 정도다. 그럼에도 퍼포먼스를 계속하는 이유는 ‘재미있어서’다.

 

붓을 두고 고민하는 그대들에게
 “전 팔도 없고 하니까 60살이 되는 2015년에 죽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오히려 팔팔하더라고요. 그래서 제 삶을 되돌아봤습니다. 팔 있는 30년과 팔 없는 30년을 비교해서 봤더니 팔 없는 30년이 훨씬 행복하고 즐거웠더라고요. 팔 있는 30년 동안 전기기술자로 살았지만, 그건 먹고 살기 위한 방편이었지 그 자체가 재미있었던 건 아 니거든요. 그런데 붓을 잡고 난 후에는 이 자체만으로 즐거움이 있는 거예요. 초기에 연습할 때, 막 몸살이 나고 그러는데도 계속 했더니 코피까지 나더라고요. 그래도 재미있었어요. 그래서 계속 했던 거예요. 힘들어도. 어떻게 이럴 수 있었나하고 따져봤더니 하나는 제 삶 자체가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프로그램이라는 거, 또 다른 하나는 아내의 헌신적인 희생이 있었다는 거, 그걸 깨닫게 됐어요. 그렇게 30 년을 살았으니까 남은 인생은 보답하며 살아야겠더라고요.”
2015년 1월에 시작한 성경필사도 감사하는 마음에서 비롯됐다. 하나님께 보답하고자 시작해 3년 남짓한 시간 동안 구약성서 필사 를 완료했다. 길이로만 따지면 무려 2,250m에 달한다. 성경을 모두 필사할 때까지 계속하겠다는 그는 현재 신약성서 필사를 진행 중이다. 아내에게는 신발 정리, 방 닦기 등 스스로 할 수 있는 웬만한 집안 일을 도우며 보답하고 있다. 감사하는 마음을 통해 또 다른 도전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모든 일에는 해결책이 반드시 있고 그걸 찾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전 먹을 갈 때 발을 이용했는데 그 과정에서 물집이 생기더라고요. 그런데도 굴하지 않고 계속 했더니 손하고 똑같이 먹을 갈 수 있게 됐어요. 이처럼 뭔가 일을 하려면 고통의 시간이 반드시 지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그런 과정을 생략하고, 일이 안 된다며 조급하게 생각하고 섣불리 판단을 내리다 보니 되려던 일도 안 되고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그리고 부정적으로 생각하기보다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필요합니다. 제 경험을 얘기하자면 소치 동계 장애인 올림픽 폐막식 당시 큰 화선지에 크로키를 그리는 퍼포먼스를 했는데 15분가량 걸리던 작업을 2분 40초 로 줄여야 했습니다. 소요시간을 절반 이상 줄인다는 건 아무리 봐도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언젠가는 될 것이라는 마음으로 연습을 했고 곧 성공해냈습니다. 결국 세상의 모든 일은 바로 할 수 있는 것과 조금 더 노력하면 할 수 있는 것. 이 두 가지로 나뉠 뿐입니다.” 유빙(流氷), 흘러 다니는 빙산. 그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호(號)다. 큰 빙산이 바다를 이리저리 흘러 다니는 건 자기 의지가 아니고 바람이나 조류 등에 의해 흘러 다녀지는 것, 그러다가 녹아서 물이랑 동화되는 과정이 멋지게 느껴졌다는 그의 대답은 석창우 화백이 살아온 삶을 대변해주는 듯하다. 좋은 작품, 새로운 도전을 위해 지금도 일필휘지(一筆揮之)하고 있는 그의 붓 끝이 또 무슨 의미를 전달할지, 앞으로의 행보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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