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백마문화상 시부문 당선작 - 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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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백마문화상 시부문 당선작 - 백지
  • 장미도(문창 14) 학우
  • 승인 2017.12.03 00: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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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


이곳은 뒷면이 없다 없는
벽 앞에 서 있다
토끼는 백지가 되었다 튀어 오른 순간 다시 토끼가 되는


이야기를 질질 끌며 걷는다 손가락 하나쯤 훔쳐 가도 용서하기로,
여섯 번째 손가락을 걸고 약속한다 마주 잡은 손을 확인한다 새벽
에 질감에 밑줄을 쳐야 해 바싹 마른 공식을 토막 내고 피가 빠지
는 순간을 견디는 거야


죽은 숫자를 밟지 않기 위해 절룩거리며 걷는다 지난밤의 일련번
호가 떨어져 있는 바닥, 아니 벽, 남아있는 면, 사방에서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그 많은 입들을 받아 적지 못한다고


백지가 삼킨 토끼의 말을 듣고 있어
울음이 먼저인지 토끼가 나중에 찢어지는지
그래도 토끼는 우는지
푸른 눈, 이라고 해석하고
붉은 빛은 깜 빡 깜 빡 백지에 구멍을 뚫는다


구멍을 뚫는다 백지에 금이 간다 너는 누구냐고 묻자 안개가 걷히
고 멀리서부터 백지가 불타고 있다 새벽이 기울어지는 속도로 검은
눈이 흩날린다

 

 

당선자 수상 소감
어제는 버스를 잘못 탔습니다. 알아 차리자마자 버스는 긴 터널로 들어갔 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사람들 사이에 앉아 있었습니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습니다. 다리를 건너서, 하필 길이 막혀서, 내리지 못했습니다. 삼십 분 거리를 돌고 돌아 두 시간 만에 도 착했습니다. 같은 곳에 도달하는 것이 왜 그렇게 어려운지 모르겠습니다. 언제쯤 삶이 익숙해질까요.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 는 기분입니다. 어쩔 수 없는 일들 사이
에 있었습니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 하며 계절을 견뎠습니다. 쓸 수 있었기 에 견딜 수 있었고 가끔은 멀리 갈 수도 있었습니다. 차마 말하지 못하는 목소 리로 썼습니다. 오래 돌아가는 길이 모 두 시였습니다. 여전히 저는 시가 어렵습니다. 앞으 로도 그럴 것 같아요. 긴 시간 동안 이 름을 불렀습니다. 응, 이라는 답이 돌 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가을을 앓는 와중에 과분한 상을 받았습니다. 그래 도 써도 된다는 응원 같습니다.
 차가운 손을 잡아준 모든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을 전합니다. 또 겨울입니다. 함께 아파하고 사랑하고 싶습니다. 다음 봄에는 조금 더 또렷한 목소리로 당신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장미도 (문창 14) 학우

 

심사평
총 101명이 응모한 이번 백마문화상 시 부문 심사는 심사의 수고를 모두 잊 게 할 만큼 행복한 일이었다. 당선권 작 품들의 수준이 상당히 높았다. 심사위 원들은 응모된 작품을 여러 차례 숙독 했고 저마다 5~10편 정도의 작품을 골 라 함께 만났다. 양쪽의 겹치는 작품을 우선적으로 탁자 위에 올려놓았고 그 외에 논의해볼 만한 작품 역시 추가하 였다. 가작으로 선정한「댄서」외 2편의 경우, 유려하고 아득한 이미지의 구사 능력이 좋았다. “재가 된 것들을 모아 여러 개의 발목을 빚는다/(…)/어떤 것 이 파열하는 순간의 온도는 누가 재는 가/불꽃에는 나무의 심장 같은 것이 존 재해서 자꾸 부러지고 타오른다/(…)/ 폐허가 만들어내는 곡선은 얼마나 위 태로운가”(「댄서」)와 같은 구절에서 도 알 수 있지만, 한계를 뛰어넘고자 하는 댄서의 열망과 좌절을 불과 폐허 의 이미지로 교차시키며 아름답고도 슬프게, 성공적으로 직조해낸다. 모범 답안과 같은 이미지의 기계적 결합이 아니었다. 서로 어긋나지만 부드럽게 이어지는 이상하고 아름다운 층계를 보고 있는 것처럼 감탄스러웠으며 그 안에서 한 댄서의 몸짓이 자유로운 리 듬을 타고 구현되고 있었다. 나머지 두 편의 시에서도 사랑과 연애감정을 둘 러싼 어긋남의 상황을 자기감정과 감 각으로 깊이 소화하여 충분히 설득력 있는 이미지로 담아내고 있었다. 앞으 로 이 사람의 작품을 어떤 지면에서든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선작으로「백지」외 2편을 골랐 다.「백지」는 글쓰기에 한 메타적 시 쓰기이다. 보통 이런 계열의 시 쓰 기는 본인만 진지할 뿐 다른 사람에게 는 별다른 시적 감흥을 주지 못하는 경 우가 많은데 놀랍게도 이 시는 그것을 극복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백지를 꿰 뚫고야 말겠다는 밀도 높은 고뇌의 수 위는 시적 긴장감을 확 끌어올린다. 쓰 기의 열망을 백지와 토끼의 상호변신 의 운동성으로 포착하여 손에 잡힐 듯 결국 미끄러지고 마는 과정으로 이미 지화하는 능력 또한 한번 보면 잊히지 않을 만큼 탁월했다. 실패의 반복되는 고통을 통해서만이 닿을 듯 닿지 않는 백지 뒷면의 세계에 구멍은 뚫린다. 그 러나 이것이 완전한 구원일리는 없고 백지는 다시 시작될 것이지만 이 과정 은 신성을 향한 구도자의 그것이 될 만 큼 순도가 높았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 었다. 동봉한 다른 두 편의 시 역시 이 미지 구사의 능력이 숨 막힐 정도로 정 밀하고 정교하여 신뢰감을 주기에 충 분했다. 우리는 시를 하는 이 응모자 의 진지한 태도와 빈틈없는 집중력에 조금 더 점수를 주기로 했다. 고맙다. 이렇게 아름다운 시를 써 주어서. 진심 으로 축하와 격려를 보낸다. 그밖에도 「同生」외 2편,「숨바꼭질」외 2편을 응모한 두 사람을 잊지 못할 응모자로 부기해 두기로 한다.

 

남진우교수 (문예창작학과) 박상수교수 (문예창작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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