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웅(화학 09) 보드 라이더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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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웅(화학 09) 보드 라이더를 만나다
  • 김현정 수습기자, 윤다영 수습기자
  • 승인 2017.05.28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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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보다는 꾸준히 보드를 타는 선수가 되고 싶다“

오세웅(화학 09) 동문은 세계적인 롱보드 다운힐 월드컵인 ‘IDF 국제대회’에 활발하게 출전하고 있는 보드 라이더이다. 전 세계 5,000여 명의 롱보드 레이싱 선수가 등록되어 있는 IDF(International Downhill Federation)는 롱보드 다운힐 월드컵을 개최하는 국제기구로서 세계 20여 개국에서 매년 약 20회의 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그는 IDF와 함께 지난달 한국에서는 최초로 열린 롱보드 다운힐 대회 ‘아리랑 힐 페스트’를 공동개최했다. 최고가 되기보다는 만족하고 즐기며 꾸준히 보드를 타고 싶다는 오세웅 동문을 명대신문이 만났다.

 

경력 :

Arbor Skateboard Korea (2015~2017)

한국 RADesigns Wheels 프로모터(2016~2017)

2016 ASDC(아시아 시리즈) 한국인 최초로 참가

2016 IDF 베지하이 한국인 최초로 참가

2016 IDF 코자코프 한국인 최초로 참가

2016 IDF 한국인 랭킹 1위

2017 IDF 아리랑 힐 페스트 개최

 

Q. 롱보드 라이더라는 직업과 오 동문이 소속돼 있는 팀을 소개해 주세요.

A. 롱보드 다운힐은 언덕을 내려갈 때의 속도가 80~90km를 넘나들며 최고 속도가 137km에 달하는 극강의 다이나믹 스포츠에요. 그러니까 롱보드 라이더는 35~40인치의 긴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언덕을 내려가는 롱보드 다운힐 종목의 선수이죠. 실제로 타면 보드 위에서 중심잡기도 힘들고 체감속도도 더 빨라요. 라이더들은 월급이 따로 없고 해외대회에 참가해 상금으로 돈을 벌기 때문에 스폰서 의존이 큰 편이에요. 저는 현재 따로 스폰서는 없고, 공연을 기획하는 엔터테인먼트 회사와 계약을 논의하고 있어서 이 회사에서 활동 금액을 지원받을 예정입니다. 또 공식적인 팀은 아니지만, 지인들끼리 이름 붙여서 활동하는 팀인 ‘브리즈’가 있어요. 주말 새벽에 ‘브리즈’ 팀과 함께 강원도로 가서 주로 도로나 산에서 연습을 하죠. 저희끼리 원주 스팟, 정선 스팟이라고 부르곤 해요.

 

Q. 왜 자신의 전공과 상관없는 보드 라이더라는 직업을 택했나요?

A. 사실 이유는 간단해요. 보드가 재밌고, 하고 싶으니까. 3학년 때 ‘소울메이트’라는 교내 흑인 음악동아 리를 들어갔는데, 동아리에 늦게 들어가서 부원들과 친해지려고 롱보드를 함께 타게 됐어요. 이후 4학년이 되어 대학원을 준비하면서도 틈틈이 보드를 탔죠. 워낙 많이 타다 보니까 롱보드 라이더라는 직업에도 자연스럽게 관심이 생겼어요. 때마침 샵에서 라이더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영상을 보냈는데 운 좋게도 스폰서 제의를 받게 된 거에요. 생각지 못한 스폰서 제 의를 받으니 원래 계획했던 대학원 진학과 보드 라이더의 길 사이, 선택의 기로에 놓였죠. 저에게 선택의 힘 을 준 것은 화학과 박노경 교수님의 조언이었어요. ‘네가 하고 있을 때 더 행복한 것을 해라’ 그래서 전 바로 보드를 선택한 거예요. 이렇게 선수 생활을 시작하게 됐는데, 정말 사람 일은 모르는 것 같아요.

 

Q. 보드를 탈 때 가장 뿌듯했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A. 작년에 IDF 국제대회 중 베스트로 꼽힌 체코의 코자코프 대회에 한국인 최초로 입성했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다양한 나라에서 약 200명의 선수가 오는 대회인데 최초의 한국 선수로서 코자코프 산 정상에서 내려갔을 때가 가장 뿌듯했어요.

 

Q. 선수 생활 중에 슬럼프를 겪거나 힘든 일이 있었나요?

A. 아무래도 다쳤을 때가 가장 큰 슬럼프였던 것 같아요. 보드 라이더라는 직업 자체가 부상이 정말 많아요. 손가락뼈가 부러져 연습을 못 했던 적도 있고, 저 번 주엔 팔이랑 정강이가 찢어졌어요. 이러다간 제 명에 못 죽을 것 같아요. 다치게 되면 회복할 때까지 오래 쉬게 되기 때문에 복귀할 때 적응하는 것도 만만치 않게 힘든 일이에요.

 

Q. 대학교 재학 중에 오 동문은 어떤 학생이었나요?

A. 공부 빼고는 다 해 본 학생이었던 것 같아요. 1, 2 학년 때는 과 응원단을 하면서 응원 단장을 했고, 3학년 때는 소울메이트라는 흑인 음악동아리에 들어가 회장을 맡았어요. 동아리를 하면서 부원들과 보드를 타러 가서 수업도 자주 빠졌죠. 그때 당시 랩 녹음도 했는데 하다 보니까 연예인 병에 걸려서 수업에 선글라스를 끼고 들어간 적도 있어요.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서포터즈와 같은 대외활동도 해볼 걸’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보드를 좀 더 빨리 시작했으면 어땠을까’라 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그거 말고는 만족스럽게 대학 생활을 한 것 같아요.

 

Q. 지난달 28일부터 30일까지 한국에서 열린 IDF 아리랑 힐 페스트 대회의 주최 측으로 참여하셨는데, 해외에서 열렸 던 IDF 경기와 어떤 차별점이 있나요?

A. 경기 영상을 찍어서 스크린으로 생중계했어요. 해외 경기에선 이런 시스템을 시행하지 않아서 색달랐는데, 그게 가장 큰 차별점이었던 것 같아요. 또한, 오프닝으로 산 정상에서부터 첫 번째 코너까지 라이더와 관중이 행진하는 행사를 했는데 이것도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죠. 의료 시스템도 굉장히 좋았던 것 같아요. 보통 여타의 타 대회에서는 구급차를 한 대만 대기시키는 게 일반적인데 저희는 두 대를 대기시켰거든요. 경기 중에 선수 두 명이 많이 다쳤는데, 한국 선수는 갈비뼈가 부러졌고 호주 선수는 척추에 금이 갔어요. 위급한 상황이었지만 구급차도 충분했고 헬기도 불러서 병원으로 빨리 이송 할 수 있었어요.

 

Q. IDF 아리랑 힐 페스트 경기 개최자로서의 후기는?

A. 개최자로서 이성적으로 행동해야 하기 때문에 감정표현을 하지 못한다는 점이 제일 힘들었어요. 다친 선수가 생기면 다른 선수까지 마음이 불안해지고 경기력이 흔들리게 되니까 저는 안타까운 마음을 숨기고 경기가 원활하게 진행되기 위해서 흥을 돋워야 해요. 감정을 컨트롤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경기를 총괄 하며 이성적으로 행동할 수 있게 됐어요. 개최자로서 보람 있었던 점은 보드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진 거에요. 한국에서 해외 챔피언들이 보드를 타는 영상들이 SNS에 올라오고, 매스컴의 주목을 받으면서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 덕분에 한국에서 보드 붐이 일어날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가지게 됐어요.

 

Q. IDF 국제대회에 활발하게 출전하고 있는데, 경기 중 아찔한 경험이 있었나요?

A. 경기 중 다치는 일이 정말 많아요. 첫 번째로 필리핀 베지하이에서 열린 제 첫 IDF 경기에서 다쳤어요. 드리프트를 하다가 넘어져서 3~4m 정도 되는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졌죠. 이때 정말 죽음의 공포를 느꼈어요. 두 번째 로는 체코 코자코프 대회에서 예선 때 호주 선수랑 부딪혀서 구급차에 실려 갔었는데 발목이 부러졌다는 진단을 받았어요. 그때 부러졌다는 얘기가 굉장히 절망적이었죠. 이후에 병원을 가서 검사해보니 아킬레스건이 삔 거였는데 다리가 부러지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어요.

 

Q. 경기 시작 전 마음가짐은?

A. 내리막길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출발지점에 서 있을 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긴장돼요. 보드를 탈 때 브레이크가 없고 다 기술로 조절해야 하는데 드리프트 기술이 쉽지 않아서 잘못하면 경기에서 크게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빠르지만 안전하게 타자’라고 항상 생각하죠.

 

Q. 라이더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A. 보드를 영리하게 타라고 전해주고 싶어요. 저 같은 경우에는 그러지 못해서 많이 다쳤거든요. 보드 같은 경우에는 연습할 수 있는 장소도 없고 도로에서 타야 하니까 위험 요소가 너무 많아서 항상 코스를 미리 보고 타야 해요. 제일 큰 문제는 부상인데 영리하게 타야 부상을 피할 수 있으니까 다들 조심히 타셨으면 좋겠어요.

 

Q. 앞으로의 목표나 계획에 대해 말해주세요.

A. 최고가 되겠다는 욕심은 없어요. 내가 만족할 수 있을 정도로, 보드를 꾸준히 계속 타고 싶어요. 그러면 실력도 올라가고 즐길 수 있으니까요. 라이딩 자체가 아닌 최고 랭커가 되겠다거나 어디에서 스폰서를 받겠다는 등 목표를 그쪽에 집중하면 눈이 머는 경우가 생기는데 오로지 타는 거에만 집중하면 스폰서가 아니더라도 어디서든 도움이 찾아온다고 믿어요. 재밌게 사는 것이 저의 목표에요. 별건 없어요.

 

Q. 오세웅에게 명지대란?

A. 고등학생 때 공부를 진짜 못했어요. 그 당시 농구를 좋아해서 공부보다는 농구를 더 많이 했죠. 고1 때 34명 중에 29등이었고 내신은 5.8 정도였어요.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고3 때는 공부를 정말 열심히 했어요. 명지대는 열심히 했던 것에 대해 처음으로 얻은 대가라고 생각해요. 그전에는 한 번도 열심히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또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는 저는 명지대에 와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 것이 가장 좋은 것 같아요.

 

Q. 오세웅에게 보드란?

A. 보드랑 함께 있어야 내가 완성되는 느낌이에요. 제게 자신감을 주는 것이죠.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것이며, 나를 표현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제 인생에서 보드가 없다는 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보드를 타면 행복하고 편해요. 앞으로도 쭉 보드와 함께하고 싶어요.

글 : 김현정 수습기자 jeonge@mju.ac.kr

윤다영 수습기자 jm04030@mj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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