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속에서 찾은 우리의 길, 강경대 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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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속에서 찾은 우리의 길, 강경대 그는 누구인가?
  • 임다원, 최시연 수습기자
  • 승인 2017.05.14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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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속에서 찾은 우리의 길, 강경대 그는 누구인가?

 

그속에서 찾은 우리의 길, 강경대 그는 누구인가?


1991년 스무 살의 봄, 강경대 열사가 마주친 사회는 병 들어있었다. 당시 학교 측은 학생들과 상의 없이 등록금을 인상했고 총학생회장의 연행 이후 학교는 일방적 인 학사행정을 운영했다. 우리대학 학우들은 ‘학원자주 화 완전승리와 총학생회장 구출 투쟁 및 노태우 군사정권 타도’를 위한 시위에 나섰고, 강경대 열사는 본대와 사수대 사이에서 연락 임무를 맡게 되었다. 단순한 시위 가 아니었다, 당국에서 시위를 금지했기에 사실상 민주 화 운동이었던 것이다. 그런 강경대 열사가 마주친 것은 흰색 헬멧에 청색 재킷을 입고 시위 진압 임무를 수행하던, 공포의 대상인 백골단이었다. 우리대학 시위에 백골단이 침탈한 것을 사수대에게 알리고자 발 빠르게 달리 던 그는 백골단의 무차별한 폭행 가운데 쇠파이프에 의 해 산화했다. 그 아비규환 속에서 내 한 몸 살고자 도망 쳤더라면, 상황은 바뀌었을까. 겨우 스무 살이었다. 우 리와 같은 교정에서 우리와 같이 꿈을 키워 나갔을 그는 단지 옳지 못한 상황에 목소리를 내고, 실천하는 행동력 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본지는 그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자 강경대 열사의 유족분들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우선 그는 경제학을 배워 사회에 환원하는 사업가가 되길 꿈꾸던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강경대 열사의 부모님은 그가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이유가 휘문고등학교 재학시절, 전국교직원 노동조합에 가입한 교사들이 해고당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고, 자연스레 정부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됐기 때문이라고 전하였다. 유독 행사가 많았던 3월, 퍼포먼스가 있다며 부모님을 초대하 여 군인에게 쫓기는 학생들의 모습, 즉 당시 정권에 저 항하는 퍼포먼스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어느날 그가 집 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음날, 걱정 속에 잠들었던 부모님이 마주한 강경대 열사의 얼굴에는 붕대가 감겨있었고 그는 등산을 하던 중 나무 덩굴에 찢어졌다고 둘러 댔다. 부모님이 거짓말임을 직감하여 학교에 연락한 끝 에 학교에서 최루탄을 직격으로 맞아 다쳤으며 그 치료비로 학교 측에게 단 8만원을 받았음을 알게 되었다. 이렇듯 점점 고조되어가는 상황 속에서 4.26일 아침, ‘엄 마 아빠, 학교 가서 공부 열심히 하고 올게요.' 라는 쪽지를 남겼던 그는 그대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 것이다. 아직도 강경대 열사의 산화가 먼 옛날의 일이며, 우리 와 관련이 없다고 느껴지는지 묻고 싶다.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이 존재한다. 추모제를 통해 그를 알아가고 열사 정신을 계승하는 일은 이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를 바꾸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길을 걸을 자 누구인가, 또 그 길을 걷는 자 누구인가.

강경대 열사 추모행사를 따라 “경대 형이 살아계셨던 시대와 지금의 상황이 많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추모제 전날 인문캠 학생회관 5층 추모사업실에서 임 재우(법학 14) 추모사업단 대표와 이야기를 나눴다.

Q. 열사정신과 관련해서 말해 주실 내용이 있다면?

A. 이번 추모제 기조는 ‘역사의 새로운 장, 촛불로 밝히자’입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이 됐지만, 그가 저질러 놓은 수많은 적폐는 아직 남아있습니다. 세월호 도 인양되긴 했지만, 진실은 아직 가라앉아있고, 박근 혜 전 대통령이 체결한 한일합의도 여전하므로 우리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도 열사 정신을 계승하여 촛불로서 역사를 다시 밝혀 나갔으면 합니다.

Q. 학우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A. 경대 형이 사망하신 91년 4월 26일이 멀리 있는 일 이 아니라는 것과 형이 살았던 시대와 지금의 상황이 많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희 가 하는 추모제는 슬퍼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나아가 열사 정신을 계승, 현재의 싸움을 이어 나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학우 분들이 이 사회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고민해보는 장이라고 생각하고 많이 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다음날 26일, 우리대학 인문캠 본관 10층에서는 강경 대 열사 26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행사는 △풍물놀이 △ 국민의례 △귀빈소개 △강경대 열사 약력 소개 △추도 사 △연극 △강경대 장학금 및 문학상 시상 △재학생 대 표 발언 △시낭송 △추모위원장 발언 △열정단 합창 △ 유가족 말씀 △노래 △헌화순으로 진행됐다. 그곳에서 강경대 열사 추모위원회에서 연극 주체이자 극예술연 구회의 회장인 이수진(철학 16)학우를 만날 수 있었다. 

Q. 행사에 참여해준 학우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A. 우리나라의 어두운 시간 속에서도 명지대학교에 서는 강경대 열사를 기리고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 했습니다. 강경대 열사는 어두운 시간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게 해준 중요한 역할을 하신다고 생각합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당하면서 국민이 가진 큰 힘에 대 해서도 알게 되었습니다. 열사 정신을 계승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와 자유를 누리는 지금 같은 세상은 강경대 열사와 같은 분들이 있었기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추모제에 참석한 정가희(경제 16) 학우와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Q. 이번 추모제를 어떻게 알고 참석하게 되었는지?

A. 경제학과 부회장이 되어 경제학과 대표로 지난 2 월 이천 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이천 민주화 운동 기념 공원에서 민주화를 위해 희생하신 많은 분의 묘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내 역을 다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추모준비위원회에 들어가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Q. 평소 강경대 열사에 대해 알고 있었는지?

A. 경제학과 과방에 강경대 열사의 영정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신입생 시절부터 강경대 열사가 살기 좋은 세상을 위해 희생하신 분이라는 것을 들어왔습니다.

Q.추모제를 통해 알게 된 점이나 느낀 점이 있다면?

A. 강경대 열사를 비롯한 많은 분이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싸우셨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추모뿐 만 이 아니라 열사 정신에 대해 고민하고, 후대를 위해 더 욱 행복한 세상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번 추모제를 통해 강경대 열사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강경대 열사는 비록 떠났지만, 우리에 게 많은 것을 남겼다. 학우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우리는 많은 학우가 강경대 열사에 관심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강경대 열사는 자신의 정신을 계승하는 후배 들을 보며 흐뭇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민주화를 향한 발걸음 강경대 열사, 그가 살던 시대는 어떠했는가. 전두환 정권이 끝나고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며 상황이 나아지는가 했으나 그렇지 못했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자살사 건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당시 노동자들의 권리는 바닥 에 떨어진 상태였고 대학생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한 투쟁에 힘썼다. 그런데도 정부는 약자인 노동자를 대상으로 억압적인 정책을 펼쳤다. 우리대학의 상황도 참담했다. 학교는 필요 없는 부분을 예산으로 책정하며 등록금을 일방적으로 인상했고 이에 학생들은 등록금 투쟁 을 벌였다. 총학생회에서 자체적으로 등록금을 받으려 고 시도하자 학교 교직원은 은행 측에 총학생회의 계좌 폐쇄를 요구했고 은행은 이 요구를 수락하였다. 이 과정 에서 학교는 정부나 검찰과 밀착되어있는 것이 아니냐 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 대학생들은 정부에 대한 불신이 가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대학 학우들이 등록금 협상을 위해 투쟁하던 1991년 4월 24일, 박광철 당시 총학생회 회장이 불법 연 행되자 투쟁 현장은 더욱 격해졌다. 이틀 뒤, 우리대학 재학생들이 인문캠 학생회관 1층에 모여 시위를 하던 중 강경대 열사가 전경사복체포조(이하 백골단)의 폭행 으로 산화했다. 신군부의 폭력적인 시위 진압이 무고한 학생의 생명을 빼앗아간 것이다. 강경대 열사의 죽음 후 몇몇 전경과 의경은 양심선언 을 하기도 했다. 이후 등록금 협상 문제는 합의점을 찾아 해결됐으며, 백골단 해체 관련 논의가 있기도 했다. 강경대 열사의 산화는 전국적인 학생투쟁의 심지가 되 었으며 △김기설 열사 △김귀정 열사 △김영균 열사 △ 김철수 열사 △박승희 열사 △박창수 열사 △손석용 열사 △운용하 열사 △이정순 열사 △정산순 열사 △천세 용 열사 총 11인의 열사를 낳았다. 우리는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가. 강경대 열사가 희생 된 지 26년이 흘렀다. 우리의 상황은 나아졌는가? 전 대통령이 탄핵당했다. 우리 손으로 쓴 역사이다. 하지만 아 직 국정농단 사태가 완벽히 해결되지 않았으며, 세월호 의 진실도 드러나지 않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 한 차별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한차례 새로운 국면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새 국면을 맞이하기 전, 1991년 강경대 열사의 정신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는 학교의 주인으로, 사회의 주인으로 세상에 나섰다. 그가 없었다면 우리는 이 같은 민주화 시대에 살 수 있었을까? 이 사회의 주인으로서 우리는 투표권을 가졌다. 국민이 끌려다니는 나라가 아닌 국민이 이끄는 나라로 바 꿀 차례이다. 강경대 열사, 그리고 11인 열사의 정신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을 기억하며 우리의 사회를 바꾸기 위해 우리가 가진 권리를 포기하지 말고 행사해 야 한다. 우리의 목소리가 울려 퍼져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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