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농구선수, SK나이츠 김준성(경기지도 11) 동문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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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농구선수, SK나이츠 김준성(경기지도 11) 동문을 만나다!
  • 김소정 기자
  • 승인 2016.12.07 10: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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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진짜 농구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죠. 짜릿했어요.

프로 농구선수, SK나이츠 김준성(경기지도 11) 동문을 만나다!
이게 진짜 농구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죠. 짜릿했어요.
 

인물 김준성 사진 1.JPG

대학생, 김준성
 

농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중학교 2학년 때 농구를 처음 시작했어요. 그때 주위의 많은 사람이 만류했지만, 농구가 너무 좋아서 어린 나이에 고집을 피워서 하게 되었죠. 그만큼 열심히 했습니다.
중·고등학교 때 동아리 같은 활동도 하셨나 봐요.
동아리는 아니고 형들과 같이 많이 하곤 했었죠. 그러다 보니 농구 실력이 늘게 됐고, 학교에서 가장 잘하게 돼 중학교 2학년 때 농구선수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것 같아요.

명지대 농구부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무엇인가요?
축제 때 친구들과 놀았던 기억도 많이 나고, 또 수업도 들었었던 기억이 나요. 저희 체육부도 교양수업을 병행해서 듣거든요. 농구와 수업을 병행해야 해서 어려움도 있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수업이 있으신가요?
가장 기억에 남는 교양은 ‘발표와 토의’수업이요. 3분 스피치를 해야 했는데 운동부는 보통 다 포기했지만, 저는 컴퓨터를 잘할 줄 모르니까 종이에 써서 했어요. 교수님이 그 노력을 좋게 평가해주신 것 같아요. 그리고 A+라는 좋은 결과까지 받아서 기억에 많이 남아요.
또 ‘댄스 스포츠’도 재밌었던 기억이 있어요. 그 수업에서 커플이 많이 생기더라고요.
명지대 학우들에게 추천하시는 건가요?
네. 남자친구나 여자친구가 없으시면 들어보시기를 추천합니다. 하하.
 

명지대를 다니며 농구연습 외에 휴식은 어떻게 취하셨나요. 주변에 놀 거리가 부족하다고 알고 있어요.
네. 쉬는 곳은 주로 집이고 휴가를 받으면 종종 친구들을 만나기도 했죠. PC방도 가고...(웃음)
게임을 좋아하시나 봐요
네 좋아했어요. 학교 앞 PC방에서 가끔 게임을 하곤 했습니다.

그럼 이제 다시 농구 얘기로 돌아와서, 프로와 대학리그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나요.
차이가 어마어마하죠. 우선 프로는 언론과 팬들의 관심이 매우 커요. 또한, 수준 차이도 많이 나는 편이죠. 아무래도 가장 실력 있는 선수들이 모이는 곳이 프로이다 보니 수준이 높다고 볼 수 있어요. 정규리그를 하기 전 시합 때에도 엄청나게 치열한 편이에요. 보이지 않는 몸싸움도 있고. 또 구단의 이미지도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하는 부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드래프트 선발 후 명지대 김남기 감독과 나눈 이야기가 궁금해요.
그때 드래프트에서 선발되고 너무 정신이 없었어요. 그래서 스쳐 지나가며 감독님과 인사를 했는데 감독님께서 “네가 열심히 한 보상을 받는거다. 축하한다”고 말씀해주신 걸로 기억해요.
 

졸업 후, 김준성
 

대학을 졸업하고 생계를 위해 많은 일을 하셨다고 알고 있어요. 드래프트에서 선발되지 못한 어려운 시기와 그것을 극복한 방법이 있나요.
졸업반 시절 9월 17일에 드래프트에서 떨어지고 처음으로 학교 내 식당인 ‘폴 주니어’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거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직원들이나 다른학과 친구들과 친해지며 남은 한 학기는 나름 재밌게 보냈지만, 졸업을 하고 나니 막막하더라고요. 그래서 졸업 후 닥치는 대로 일만 했습니다.

그럼 졸업 후에는 농구는 아예 그만두신 건가요?
네, 농구는 아예 생각을 안 하고 접었어요. 유소년 농구교실에서 강사를 하고 카페, 장례식장에서도 일하고…. 농구는 취미로 2주에 한 번씩 하는 정도였습니다. 많이 힘들게 지냈었지만 그래도 이주에 한 번 하는 농구를 할 때 가장 행복했고 재밌었죠. (웃음)
 

실업팀 ‘놀레벤트 이글스’는 언제 들어가시게 된 건가요?
놀레벤트 이글스는 아르바이트를 다 정리하고 1년 뒤에 들어갔어요.
놀레벤트 이글스에 들어가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제가 명지대 코치를 하다가, 인터넷을 통해 농구 실업팀이 생긴다는 소식을 기사를 통해 접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김남기 감독님께 여쭤봤는데 감독님께서 “너는 아직 어리니까 도전해보는 것도 좋겠지만 쉽지는 않을 거다”라고 말씀해주셨어요. 4학년 시절, 지도를 받았기 때문에 제 실력을 누구보다 잘 아시니까 그렇게 조언을 해주셨고, 이후에 고민을 엄청나게 많이 했죠. 할까 말까….

그러다가 부모님께서 한번 해보라고 하셔서 결국 시작하게 됐습니다.
 

놀레벤트 이글스에서 활동하실 때 서러움도 많았다고 인터뷰를 통해 봤는데요, 어떤 점이 가장 힘드셨나요.
아, 동영상도 보셨어요?
네 다 찾아봤습니다.
아…. (웃음) 4학년 시절 주장을 했거든요. 그리고 명지대학교 코치를 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제가 자존심이 센 편이었어요. 근데 놀레벤트 이글스에 들어갔는데, 와…. 무시를 너무 많이 당했어요. 그 부분이 제일 참기 힘들었고, 오기가 생기는 게 아니라 ‘아. 진짜 하기 싫다. 내가 이걸 왜 하고 있나’ 이런 생각까지 들었어요. 주변의 친구들이나 아는 지도자들께 조언을 받으러 가도 왜 거기 있느냐고 하시면서 그만두라고 하셔서 그 부분이 제일 힘들었어요.
그래도 선발 되신 걸 보면 더 이를 악물고 하신 것 같아요.
그 당시 정말 포기할까 생각했었어요. 그래도 한 번 더 부모님이 “마지막까지 해보자, 어렵게 시작한 건데, 해보자”라고 하셔서 전국체전에도 나가게 됐고 좋은 결과를 얻게돼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드래프트에 지명이 되고 관객석에 있는 친구들이 더 기뻐하고 슬퍼해주던데요?
네. 그 친구들은 2주에 한 번씩 함께 농구를 하던 친구들이에요. 사실 그 친구들이 놀레벤트 이글스에 있을 당시 가장 말렸던 친구들인데 연세대학교를 이기고 나니 난리가 났죠.
 

농구를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고 짜릿했던 순간이 있다면 언제 인가요.
처음 놀레벤트 이글스가 전국체전에 출전하면서 조선대학교와 경기를 하게 됐어요. 사실 첫 경기도 걱정했었는데 88-59로 크게 이겼어요. 그리고 다음 시합은 연세대학교였는데 아무래도 정말 잘하는 팀이기 때문에, 그냥 쉽게 지지만 말고 그동안 했던 것들을 잘 보여주자는 생각으로 경기에 임했어요. 경기 초반에는 아니나 다를까 긴장을 해서 실수를 많이 했는데 제가 벤치에 물러나서 밖에서 보니 할 만해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감독님께 “정신 차렸으니까 믿고 넣어 달라”고 말씀드리고 들어가 극적인 역전을 할 수 있었어요. 경기 막판 4쿼터 종료 2분 정도를 남기고 재역전을 당했는데, 사실은 그때 끝난 줄 알았어요. 왜냐면 연세대학교는 이기는 방법을 아는 강팀이고 저희는 체력도 바닥이 난 상태였거든요. 근데 그때 제가 동점 3점 슛을 넣고, 경기 종료 1분을 남기고 점수 차를 벌리는 3점 슛을 성공시켰어요. 그때, 도망가는 3점 슛을 넣었을 때 제일 짜릿했어요. 이게 진짜 농구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죠. 엄청 짜릿했어요.
 

신장이 큰 편은 아니시지만 스피드적인 측면에서 뛰어나신 것 같아서 인상 깊었어요. 평소에 어떤 부분에 가장 신경을 쓰시나요.
스피드는 기본이고, 파워도 있어야 하는데 제가 놀레벤트 이글스에 있으면서 몸무게가 엄청 많이 빠졌었거든요.
많이 빼셨다고 알고 있어요.
근데 그게 좋은 게 아니더라고요. 작은 키지만 파워가 있어야 밀리지 않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요즘 웨이트 트레이닝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또, 3점 슛. 거리와 관계없이 잘할 수 있도록 3점 슛연습을 많이 하고 있어요.
 

선수, 김준성
 

프로농구 구단 ‘SK 나이츠’에 선수로 발탁되고 근황이 궁금해요.
일단 드래프트 당일 날, 그렇게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아본 적은 생전 처음이었어요. 선발되고 큰 인터뷰실에서 기자분들 3~40명이 전부 저를 기다리고 계셨어요. 방송사, 신문사 기자분들이 많이 오셨고 카메라도 다 저를 향해 있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스러웠죠. 그래서 못하겠다고 방에서 뛰쳐나오고 싶었을 정도로.(웃음) 그날은 전화도 여기저기서 오고 방송 인터뷰를 많이 했어요. 하지만 그게 실력 때문은 아니고 제 스토리 때문이라, 크게 그런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요즘에는 숙소에 합류해서 운동을 많이 하고 있어요. 체육관도 굉장히 좋고 숙소나 식당도 시설이 좋아요. 또 방도 혼자 쓰는데 TV도 있고 다시보기 기능도 있어서 운동시간에 보지 못하면 볼 수도 있습니다. (웃음) 징크스가 짝수라고 했는데, 등번호 8번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등번호는 구단에서 정해주는데 8번의 뜻이 오뚝이처럼 일어나라는 의미에요. 짝수라 더 좋기도 하고….
 

짝수가 징크스라고 하시지 않았나요?
짝수가 좋다는 말이에요. 예를 들어, 이 방에서 문으로 나갈 때까지 8걸음에 맞춰서 가야 하고 9걸음은 안된다. 그런 식으로…. (웃음)
존경하는 선수는 누구인가요.
미국에 ‘제레미 린’이라는 동양인 선수가 있는데 이 선수가 하버드대학교 출신인데 스포츠계에서는 이류 대학이기 때문에 매우 어렵게 NBA에 가게 됐어요. 당시에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고 방출될 위기에 처해있었는데 우연히 주전들이 부상을 당하면서 불과 방출 몇 주 전에 NBA에 투입될 기회를 얻게 된 거죠. 투입 후 엄청난 활약을 펼치면서 아직까지도 활발하게 선수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 선수가 밑바닥까지 갔다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올라온 모습이 저와 약간 비슷하기도 하고 또, 농구도 굉장히 잘해서 멋있다고 생각하는 선수예요.

‘코트의 오뚝이’, ‘농구판 미생’이라고 불리며 많은 별명이 생겼는데 어떤 별명이 가장 마음에 드셨나요.
그런 건 딱히 없어요. 제가 농구를 더 잘하게 되면 김선형 선수처럼 실력과 관련된 별명이 생길 거라고 생각해요. 속도 면에서 엄청 빨라서 ‘플래시 썬’이라는 별명이 있어요. 그런 별명같이 저도 더 잘하게 되면 그런 별명을 갖고 싶어요.
 

프로를 향한 첫걸음을 떼셨는데 앞으로 어떻게 임할 것인지 각오 한마디 해주세요.
어렸을 때는 굉장히 큰 꿈을 갖고 있었다. 나는 NBA를 가야지. 이런 꿈을 갖고 있었는데…. 아 이거 쓰지 마세요! (웃음) 대학 때도 무조건 프로를 가야지라는 생각으로 운동했고…. 근데 드래프트에 떨어지고 나니까, 너무 상심이 큰 거에요. 그래서 그때 꿈도 잃은 채 하루하루 살다가. 열심히 살지도 않고 그냥 하루 때워서 돈 받자는 식으로. 그러다가 놀레벤트 이글스에서 농구를 하면서 힘들지만 그래도 하루하루를 더욱 충실히 살았고 매일매일의 훈련에 더 열심히 임하다 보니까, 전국체전에도 나갈 수 있었고 연세대학교를 이기는 기적도 생겼고 드래프트에 지명되는 순간도 있었으니까…. 한 번의 훈련에도 최선을 다하고 하루를 정말 성실하게 살다 보면, 좋은 기회가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에 계속하여 성실히 임할 생각입니다.
 

마지막으로 명지대학교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주세요.
하하. 이런 게 제일 어렵더라고요. 이번에 졸업하시는 분들도 있고, 학년이 올라가는 분도, 휴학하시는 분들 외에도 많이 계시겠지만 졸업하시는 분들이 가장 걱정도 많을 것 같네요. 저의 예를 들어 드래프트는 한 번에 끝나지만, 취업은 여러 번 도전할 수 있잖아요. 저를 통해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으셨으면 좋겠고 원하시는 곳에 꼭 가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재학생들에게는 좋은 추억을 많이 쌓으라고 말하고 싶어요. 저는 대학 시절 많이 놀 수 없어서 아쉬운데, 대학 때 친구들과 많은 경험을 쌓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해요. 수업 혹은 동아리 활동 등을 열심히 하고 또 운이 좋다면 좋은 결과가 날것이고 그러면 본인에게 좋은 자산으로 남을 거에요. 마지막으로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들을 해왔는지 한 번쯤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시길 바라요.
 

취업 외의 다른 다양한 방면으로 가는 학우들에게도 한마디 해주세요.
아…! 그런 분들은 정말 존경합니다.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가는 거니까. 일단 쉽지 않을 건데 힘들겠지만 한번 실패하더라도 절대 포기하시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초심의 그 열정을 잊지 않고 끝까지 갖고 있으면 결국 잘 되실 겁니다. 기대하겠습니다!

인물 김준성 사진 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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