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과 레이디, 재상과 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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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과 레이디, 재상과 요리
  • 윤덕노 음식문화칼럼니스트
  • 승인 2016.11.28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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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과 레이디, 재상과 요리

빵과 레이디, 재상과 요리
 

고디바(Godiva)를 아는가? 유명 초콜릿 브랜드라는 대답이 십중팔구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고디바는 11세기 영국 백작 부인의 전설에서 유래됐다. 벨기에 초콜릿 회사 덕분에 유명해졌는데 그만큼 의미 있는 인물이기에 브랜드로 삼았다. 고디바는 단순한 요조숙녀가 아니라 진정한 레이디(Lady)의 표본이다. 일화가 있다. 고디바의 남편인 레오프릭 백작은 과도한 세금을 부과해 원성이 자자했다. 백성을 가엾게 여긴 고디바 부인이 세금 감면을 여러 번 요청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그러다 계속된 간청이 귀찮아진 백작이 뜻밖의 제안을 했다. 알몸으로 말을 탄 채 마을을 한 바퀴 돌면 세금을 줄여주겠다는 것이다. 백작의 예상과는 달리 고디바가 선뜻 제안을 수락해 알몸으로 마을을 돌아다녔다. 백성들은 고디바 부인을 존중하여 자발적으로 창문을 닫고 부인을 쳐다보지 않았다. 백작은 약속대로 세금을 줄였고 고디바는 진정한 ‘레이디’로 백성의 칭송을 받았다. 여담으로 고디바 부인이 나체로 마을을 지날 때 톰이라는 청년이 약속을 깨고 창틈으로 부인의 알몸을 훔쳐봤는데 여기서 ‘몰래 훔쳐보다’라는 영어의 숙어 ‘peeping Tom’이 비롯됐다. 약속을 어긴 톰은 주민들로부터 몰매를 맞아 장님이 됐다.
 

어쨌거나 어진 지도자일 수는 있겠지만 진정한 레이디와는 별 관련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고디바가 왜 레이디의 표상일까? 어원 때문이다. 레이디는 ‘숙녀, 귀부인’이라는 뜻이지만 어원은 엉뚱하다. 고대 영어 ‘흘라프디게(Hlafdige)’에서 비롯됐는데 ‘흘라프(Hlaf)’는 빵, ‘디게(Dige)’는 일하는 여자라는 뜻이다. 쉽게 말해 빵 만드는 여자다. 그러면 빵집 여주인이어야지 왜 귀부인이라는 뜻이 됐을까 싶은데 남편의 직업과 관련 있다. 레이디의 남편은 군주 혹은 귀족(Lord)이다. 그런데 이 단어의 어원이 또 예상 밖이다. 고대 영어 ‘흘라프베아르드(Hlafweard)’에서 나왔다. ‘흘라프’는 빵, ‘베아르드(Weard)’는 지키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빵을 만들고 지키는 사람이 바로 군주고 귀부인이다. 여기서 Lord와 Lady, 즉 지도자 부부가 지켜야 할 기본 덕목을 확인할 수 있다. 고대 게르만 전통에서 귀부인인 레이디는 부족이 먹을 빵을 만드는 여자, 군주(Lord)는 그 빵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한 마디로 먹을 것을 하늘로 삼는(以食爲天) 백성을 잘 먹고 잘 살게 해주는 것이 지도자의 의무라는 뜻이다.
 

영어뿐만 아니라 한자에도 비슷한 의미가 있다. 바로 재상이라는 직책이다. 재상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높은 관직으로 조선에서는 정2품 이상, 지금도 국무총리나 장관쯤 돼야 재상 소리 듣는다. 그런데 고대 동양에서는 엉뚱하게 주방장이 재상이었다. 한자를 보면 알 수 있는데 ‘재상 재(宰)’자는 ‘집 면(宀)’ 아래에 ‘매울 신(辛)’자로 이뤄진 글자다. ‘신(辛)’이라는 한자는 라면 브랜드 덕분에 맵다는 뜻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죄인, 하인’이라는 뜻도 있다. ‘재(宰)’는 고대 귀족 가문에서 집안일을 총괄하는 사람 혹은 주방 일을 도맡아 관리하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비롯된 단어다.

그러면 재상의 상(相)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서로’라는 뜻 외에 접대하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다. 동양 고전인 『주례(周禮)』에는 제사에 참석한 사람을 접대하는 관직이라고 나온다. 정리하면 재상은 집안에서 살림을 맡아 음식을 장만해 제사를 지내고, 참석자를 접대하며 공평하게 분배하는 사람이었다. 터무니없는 소리 같지만 고대 국가를 상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고대 씨족사회에서 군주는 가문을 이끄는 씨족장이었으니 족장의 집이 곧 나라고 집안 일이 나랏일이었다. 씨족사회 나랏일 중에는 하늘과 조상님께 지내는 제사가 가장 큰 행사였다. 음식을 장만해 원로를 모셔놓고 대접하는 것이 내분을 없애는 내치고, 연회를 열어 다른 씨족과 협상하고 화합하는 것이 외교였다. 이럴 때 집안일을 도맡아 음식을 준비하고 제사를 관장하며 음식을 공평하게 나누어주는 역할이 제일 중요했기에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이 주방장을 맡았다. 이런 주방장이 왕권강화 후 재상이 된 것이다. 그런데 레이디가 제역할 못하면 어떻게 되나? 그저 빵 축내는 여자가 된다. 그리고 재상이 엉뚱한 짓하니 진짜 죄인이 된다.
 

푸드인문학 칼럼 인물 사진.jpg

윤덕노 음식문화칼럼니스트
ohioyoon97@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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