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의 과거, 그리고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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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의 과거, 그리고 오늘
  • 공하영, 서인애, 윤휘종, 조희수, 김지수 기자
  • 승인 2016.11.14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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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기사로 살펴보는 각 시대상

대학의 과거, 그리고 오늘
탑기사로 살펴보는 각 시대상
 

탑기사는 발행되는 주간에 가장 논란이 되거나 중요한 소재가 선정돼 작성된다. 따라서 그 당시의 대학의 관심사, 대학생들의 생각 혹은 이슈가 담겨진다. 이런 점에서 탑기사는 당시 대학의 거울이라 부를 수 있다. 이에 본지는 탑기사를 시대별로 분석해 과거의 대학의 이슈는 무엇인지 현재와는 어떻게 다른지 알아보고자 한다.


 

1960년대

신문은 그 당시의 시대상을 가장 잘 나타내는 매체이다. 명대신문의 60년대 모습은 어땠을까? 1960년대는 사회 전반적으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6·25 전쟁 이후, 피폐해진 사회를 복구하기 위해 급속도로 산업화가 진행됐다. 그에 따라 국민의 삶의 질도 더불어 향상됐다. 이와 같은 경제적 발전이 있었지만, 다른 한편에선 정치적으로 군부 쿠데타를 겪으면서 국가 독점 자본주의화가 심화됐다. 이는 사회 운동이 활발해지는 계기가 됐다. 특히 1960년도는 △4·19혁명 △한일국교 정상화 △6·3운동 △국가와 사상 탄압 등이 일어나며, 정부에 대한 시민들의 적극적인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위와 같은 사회적 상황은 1960년대 발행했던 명대신문에도 그 모습 그대로 반영돼 있었다.
 

1960년도의 명대신문은 우리대학의 오래된 역사와 함께 현재 우리대학이 존재하는데 있어 초석과 같은 역할을 했다. 1960년대에 발행했던 명대신문을 살펴보면, 우리대학이 어떻게 성장해 왔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1963년 12월 25일 53호에 ‘4년제 대학으로 승격’이란 제목으로 기사가 실렸으며 이어 1968년도에 발행된 89호엔 오래된 명성을 자랑하는 우리대학 ROTC 창단기사가 실렸다.
 

1960년도에 일어났던 4·19혁명은 학생들과 시민들이 중심 세력이 돼 일으킨 반독재 민주주의 운동이었다. 이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많은 사람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전국에 있는 대학생들은 대대적인 데모를 감행하며, 수도인 서울을 완전한 데모 분위기로 만들었다. 1963년 4월 25일 48호에 실린 ‘4월의 정열 되새기며-금국각지에서 성대한 기념식’과 이어 1964년 4월 22일 55호에 실린 ‘4·19혁명 네 돌 기념식 거행-그날의 항쟁을 돌아보며’ 같은 투쟁에 관련된 기사들이 실렸다. “일국의 희생으로 숨져간 넋들의 행복을 비는 조화”, “자유를 짓밟고 폭행을 일삼아 국민을 기만하고 영구집행을 꿈꾸던 자유당 정의를 맨주먹으로 무너뜨리고 새로운 민생국가를 이룩한 젊은이들의 애국심” 등 정부로 인해 고귀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추모하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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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호에 실린 ‘4월의 정열 되새기며-금국각지에서 성대한 기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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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호에 실린 ‘4·19혁명 네 돌 기념식 거행 - 그날의 항쟁을 돌아보며’
 

1965년 8월 30일 65호에는 ‘본 대학에 경찰관들 난입-한·일 협정 무효 데모’ 기사가 실렸다. 당시 정부는 한일외교 정상화 방침을 밝혔고 이에 반발해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하 박 대통령)은 특별담화문에서 데모를 망국적 행위로 지적했다. 우리대학 학생 데모대가 중앙청에 몰려가고, 파출소를 파괴하는 등 시위가 격화됐다. 박 대통령은 전국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며 모든 학교에 휴교령을 내리는 이른바 '6·3사태'가 발생했다고 실려 있다.
 

당시 명대신문은 △졸업식 △장학금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체육대전 등 교내에서 일어난 내용이 주를 차지했다. 하지만 위와 같은 기사를 통해, 우리대학 학생들이 학내활동에만 열중하는 것이 아닌 사회적·정치적 문제에도 매우 높은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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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호에 실린 ‘본 대학에 경찰관들 난입-한·일 협정 무효 데모’
 

공하영 기자 slovess1@mju.ac.kr

 

1970년대
 

현재 학우들은 우리대학 홈페이지나 SNS, 커뮤니티 등을 통해 소식을 얻곤 한다. 그러나 1970년대에는 지금과 같이 컴퓨터 통신망을 통해 소식을 전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신문이 정보전달의 핵심 역할을 맡게 됐다. 따라서 그 당시 탑기사를 살펴보면 현재 우리가 인터넷을 통해 간단히 알아볼 수 있는 정보들이 탑기사의 주를 이뤘다. 매년 △신입생 모집 요강 △입학식 △각 학회 및 서클 봉사활동 △신입생 환영회 △백마체전 일정 △백마체전 결과 △장학생 선발 △학기말고사 일정 △하계방학 활동 계획 △학위수여식 등 학우들이 알아야 하는 기본적인 정보들은 탑기사의 소재가 됐다. 1974년 7월 30일에 발행된 181호에서는 일부 이공학부가 현재 인문캠이라고 불리는 캠퍼스로 이전했다는 소식과 같은 굵직굵직한 소재가 소개되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탑기사의 소재들은 정보 전달의 역할과 동시에 당시 사회상을 반영하는 요소가 포함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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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10월 30일 144호 탑기사
 

1970년대는 ‘유신 시대’이다. 대학교내에서 군사교육이나 교련훈련 등이 실시됐고 계엄선포로 각종 행사나 학생활동이 전면 중지되기도 했다. 또한, 정부의 학도호국단 설치령에 따라 총학생회와 각 학과 및 서클이 해체되고 학도호국단으로 대체됐다. 이후 우리대학은 학생층의 유기적인 조직이자 사상통일과 단체적 훈련을 강화하기 위해 조직됐던 학생자치훈련단체인 학도호국단을 중심으로 운영됐다. 이와 같은 내용은 1970년대 명대신문의 핵심 요소였다. 신문에 실린 입학식 훈사, 신년사에서도 그 당시 사회상이 드러났고 연례적인 행사에서도 유신 시대를 반영하는 요소가 포함돼 있었다.
 

1970년대를 생각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학도호국단이며 이는 명대신문에서도 자주 등장했다. 1975년 6월 30일 202호 탑기사에 따르면 우리대학의 호국단은 유사시 동원하기 쉽도록 군사훈련편제와 같이 편성됐고 대대, 중대와 같은 명칭을 사용했다. 평상시에는 군사교육과 새마을운동지원을, 전시에는 후방질서유지와 지역방위, 대민구호사업 등의 기능을 담당하도록 했다. 즉, 유신 정권의 군사체제가 우리대학 운영에도 반영된 것이다.
 

우리대학 호국단은 군사훈련이나 교육 외에도 다양한 활동을 실시했는데 교내환경 정화운동, 모국어의 발전을 위한 국어순화운동 등을 진행했다. 1979년 4월 1일 270호에 실린 호국단 월별활동계획표에 따르면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학풍조성정화운동, 봉사활동 등 연례적인 행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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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6월 30일 202호 탑기사
 

1970년대 우리대학의 대부분의 일은 학도호국단 중심으로 운영됐고 명대신문은 그 사실을 학우들에게 전달하는 소식지였다. 하지만 학우들의 의견을 듣고 학교 발전을 위해 비판하는 역할도 놓치지 않았다. 명대신문은 학장과의 직접적인 회견으로 그 당시 있었던 학내 문제를 논의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1974년 9월 30일 184호 탑기사에서 명대신문은 당시 학장이었던 유상근 학장과 회견을 진행했다. 회견에서는 제10대 총단의 자치활동과 일부 이공학부의 이전을 계기로 한 종합캠퍼스 문제 등 대학에서 가장 논란이 되고 이슈가 되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어 제2대 박일경 학장과의 회견에서도 정치적ㆍ경제적 어려운 현실의 시국관이나 종합대학의 승격문제 등을 이야기하고 학우들에게 전달했다. 즉, 1970년대 명대신문은 정보전달이라는 언론의 기본적인 기능과 더불어 학내문제를 함께 고민하는 역할을 다했다고 볼 수 있다.
 

서인애 기자 inne0730@mju.ac.kr

 

1980년대
 

1980년대 하면 무슨 단어가 떠오르는가? 여러 키워드를 제시할 수 있겠지만 군사독재시절이기에 5·18 민주화 운동, 6월 민주항쟁과 같은 민주화 운동을 빼놓고는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학생들도 민주화 운동의 주역을 맡았다. 눈부신 경제성장과 더불어 자랑스러운 우리나라의 역사이다. 그런데 민주화 운동이 독재정권을 향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1980년대 명대신문에는 학원자율화, 재단사퇴 촉구, 직선제 등의 낱말이 자주 등장했다. 이는 독재정권이 학교에까지 영향력을 미쳐 학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학생 운동도 치열하게 벌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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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5호 ‘학원문제해결 위한 자율적 시위’ 탑기사
 

명대신문 1980년 4월 15일 285호에서 다뤄진 학생들의 철야농성은 학원 민주화를 위한 학생들의 헌신을 보여줬다. 철야농성은 3월 28일 제2차 공청회 직후 일어났다. 총학생회장 직접 선거를 요구했던 학생들의 의견은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교 측 시안발표에서 임홍근 당시 학생처장은 “대학은 A급, B급, C급 학교로 나눌 수 있는데 A급은 총학생회 부활을 결성하고 B급은 학도호국단과 총학생회를 절충하여 운영하며 C급은 예전 학도호국단 체제를 그대로 따른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대학은 B급에 해당하는 학교이므로 총학생회장 선거를 간선으로 할 것”이라고 전했다. 학생들은 흥분해 운동장으로 집결했고 이사장에게 확고한 답변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사장이 이에 불응하자 학생들의 이사장실 점거가 이뤄졌다. 150명의 학생들은 철야농성에 들어가 28일간 밤을 지새웠고 그 결과 1980년 5월 15일 287호 명대신문에서 명지대학 출범 32년 만에 최초로 직접선거에 의해 총학생회장이 선출됐다는 탑기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학원 민주화를 위한 시위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명대신문 1988년 5월 10일 457호에 따르면 학생들은 학원 민주화 및 학내 제반 복지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학원민주화 추진위원회(이하 학민추)를 설립했고 “본교 경영권 포기”를 슬로건으로 투쟁에 나섰다. 50명의 영어영문학과 학생들은 명진당을 점거하고, 인문대 학민추는 총장실을 점검했다. 나아가 공과대학 학생 8명은 삭발식까지 단행했다. 김창덕(화공) 학생과 박성교(화공2) 학생은 ‘재단타도’라는 혈서를 쓰면서 격렬한 시위를 이어갔다. 이 현장에 명대신문도 함께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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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5월 6일 학원 민주화 투쟁 중 진행된 삭발식
 

이뿐만 아니라 과거에 양캠 이원화가 자리 잡기 전에 학교측과 학생측 사이에 마찰이 있었던 것도 기사를 통해 찾아볼 수 있다. 명대신문 1988년 11월 15일 470호에 따르면 89학년도 신입생 모집요강이 발표된 후 학내에서 시위가 일었다. 발표된 요강에 의하면 서울캠퍼스가 주간화 돼 일부 학과가 서울캠과 용인캠에 중복돼 나타났다. 이에 용인캠 학생들은 이를 ‘용인캠 분교화 정책’이라 판단하고 ‘서울캠 주간화 저지 투쟁’을 요구하는 시위에 나섰다. 이로 인해 용인캠 학사일정이 중단되고 행정 또한 완전 마비됐다.
 

우리대학의 직선제의 시초와 학원 민주화를 위한 투쟁, 그리고 변화에 따른 학생들의 반응을 1980년대 명대신문 기사를 통해 알 수 있었다. 1980년대는 언론탄압이 지금보다 심했음에도 불구하고 명대신문은 ‘침묵을 거부하는 자는 오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언론의 역할을 다했다.
 

윤휘종 기자 logosnfaith@mju.ac.kr


 

1990년대
 

1990년대는 정치·경제적 성과가 집중돼 나타나는 시기였다. 국가주도 경제개발의 결실이 최고조의 모습으로 가시화돼 나타난 시기로 그 어떤 시기보다 물질적 풍요로움이 넘쳐 흘렀다. 하지만 1997년, 우리나라를 강타한 IMF 외환위기는 회사원들에게는 실업, 자영업자들에게는 폐업, 대학생들에게는 등록금 문제로 다가왔다. △기성회비 수업료 통합 △용인, 등록금 삭감 간담회 △등록금 신입생 인상 △‘2천년 등록금’ 인상 가능성 등 실제로 1997년 이후 명대신문에는 등록금 관련 기사가 명대신문의 1면을 주로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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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5월 10일 676호 탑기사
 

1999년 5월 10일 676호 명대신문 기사에는 ‘용인, 등록금 삭감 관련 간담회 개최’ 기사가 실렸다. 내용은 등록금 삭감과 민중생존권 쟁취를 위해 청년학생 운동본부에서 용인 배움터(현 자연캠)총장실을 점거하며 투쟁을 시도했으며 사태를 해결하고자 송자 총장과 유병진 부총장, 김윤희 청년학생 운동본주장이 간담회를 개최한 것이다. 즉, 1997년 IMF외환위기 후, 등록금에 큰 부담을 느끼고 있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학우들이 적극적인 행동에 나섰고 명대신문이 이를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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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6월 11일 517호 탑기사
 

또한 1990년대는 학생운동이 활발했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비록 1970년대의 박정희 대통령 독재의 유신시대가 끝나고 ‘민중의 봄’이 다가왔지만, 여전히 대학생을 상대로 격렬한 탄압이 있었던 시기였다. 1991년 6월 11일 명대신문 1면에는 ‘고 강경대 열사 49재 추모사업 진행’ 기사가 실렸다. 강경대 열사는 당시 우리대학 총학생회장이었던 박광철의 석방을 위해 진행된 구출대회에 참가했다. 강경대 열사는 진압하려는 사복을 입은 경찰관들에 의해 심각한 타박상을 입고 이를 발견한 학우들에 의해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한 시간 만에 사망했다. 이후 강경대 열사를 추모하는 사업이 매년 진행되고 있으며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명대신문에서도 이를 주제로 매년 특집 기사를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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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9월 16일 630호 탑기사
 

이처럼 1990년대는 대학생들이 진압경찰들에 의해 탄압을 받았았고, 치열한 학생운동을 벌어졌던 시기였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명대신문은 이러한 학우의 시위소식을 전하는 역할을 했다. 또한 명대신문은 학사개편 등 학내문제를 전하는 데도 소홀하지 않았다. 1996년 9월 16일 기사에는 ‘인문계열 3개 학과 이전’에 내용이 실렸다. 기존 용인배움터에 있었던 인문계열 문창과, 영어과, 일어과가 계열별 이원화 정책을 추진함에 있어 ‘이전해야 한다’ 측과 ‘이전해서는 안된다’는 측이 첨예하게 갈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명대신문을 통해 학우들은 의문점이었던 ‘영어과 이전 후 기존 용인배움터(현 자연캠) 교양영어교수 부재’와 그에 대한 답변인 “교수진을 추가로 임용해 영어교양학부를 추가로 구성할 계획”을 학교 측으로부터 얻어낼 수 있었다. 명대신문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에 국한되지 않고 학내문제에 대해 학우들이 가지고 있던 의문점을 해소하는 역할도 했던 것이다.
 

조희수 기자 choheesu@mju.ac.kr

 

2000년 이후
 

2000년대는 단순히 20세기에서 21세기로 바뀐 것뿐만 아니라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도 많은 변화가 일어난 시기이다. 이에 우리대학은 2000년대 급변하는 환경변화에 대처하고 교육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사회적 요구와 여건을 반영한 ‘MJU 2015 중장기발전계획’을 발표했다. 실제로 △국내 10위권 대학 진입 박차 △용인, 제3기숙사 내년 1학기 입사 가능 등의 학내의 굵직굵직한 사업들이 명대신문의 1면 기사를 통해 소개되기도 했다.
 

또한, 2000년대는 우리대학 안에서 크고 작은 사건들이 많이 발생한 시대이기도 하다. 2000년대 말, ‘학교 측, 대학노조 명지대 지부와 합의해’ 기사를 보면 2009년 8월 조교 45명을 일방적으로 해고하는 사건이 발생해 대학노조 명지대 지부는 246일간 파업을 진행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동안 대학 당국과 기간제 근로자인 행정조교 직군에 대한 고용갈등은 동덕여대, 한국외대, 연세대 등 여느 다른 대학에도 있어왔지만 중노위 판정이 내려진 것은 최초였다. 명대신문에서도 당시 단체로 해고될 위기에 처한 조교들에 대해 기사를 실으려고 했지만 기사가 삭제, 신문의 한 면이 텅 빈 채로 발행되기도 했다. 대학의 재정적 지원을 토대로 구성되는 대학언론의 특성상 완전한 자유가 보장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또한 ‘계속되는 인문캠 총학생회 선거 논란, 우리 손으로 해결해야’라는 기사를 통해 인문캠 선거논란에 대해 학우들이 총학생회장 직무집행정지 가처분을 신청하는 사건도 있었다. 결국 기각됐지만, 이 사건은 학생들 사이에서 학내선거에 대해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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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1월 6일 704호 탑기사
 

2000년대는 정보화시대이기도 하다. 이에 발맞춰 우리대학은 중장기 발전계획 중 정보화 영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는데 바로 이 시기에 ‘종합정보시스템’이 구축됐다. 종합정보시스템은 현재 학우들이 학사행정업무를 위해 가장 많이 찾는 시스템 중 하나로, 기존의 단편적인 업무 중심의 전산화방식에서 벗어나 학사행정, 일반연구 등의 전반적인 행정업무를 웹을 기반으로 작업하려는 목적으로 생겨났다. 우리대학에서는 종합정보시스템 이외에도 지식관리시스템(KMS)이나 전자도서관 시스템, 멀티미디어 강의 캠퍼스를 도입하는 등 정보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학우들은 변화하는 시대에 발맞춰가려는 우리대학의 시도를 이러한 탑기사를 통해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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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9일 920호 탑기사
 

2011년 5월에는 우리대학 내 한차례 큰 파문이 일었다. 명지학원의 유영구 전 이사장(이하 유 전 이사장)이 구속되고 횡령ㆍ배임 의혹이 확정된 것이다. 이에 당시 자연캠 총학생회(회장 진철현ㆍ정통 06)에서는 유 전 이사장의 비리에 대한 입장을 밝히며 ‘학생비상체제’를 선언을 하고, 학생대표자들을 중심으로 ‘재단 비리 규탄 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했다. 또한 당시 인문캠 총학생회(회장 김현아ㆍ행정 07)는 유 전 이사장 관련 기사를 프린트해 배포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다. 사학 비리에 대한 사항은 아직도 학우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큰 문제이다. 그 당시 학우들은 대학 곳곳에 대자보를 붙이고, 자연캠 전체 학생총회를 성사시키는 등 적극적으로 사학비리를 척결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명대신문에서도 이와 관련한 기사들을 1면으로 보도하며 많은 학우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렸다.
 

시대는 계속해서 흘러가고 신문은 그 시대를 따라간다. 62년 동안 명대신문은 변화의 흐름과 크고 작은 사건들을 충실히 전달하고 기록해왔다. 앞으로도 명대신문은 언론의 사명을 다할 것이다.
 

김지수 기자 food0312@mj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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