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와 패션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다. 총선이 끝난 지 오래고, 대선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먼데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태평양 너머에서 한창 진행 중인 미 대선에 세계인들의 이목이 쏠리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과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독특한 언행으로 관심의 중심에 선 도널드 트럼프와 미국 최초 여성 대통령 후보 힐러리 클린턴의 대결은 우리에게도 매우 흥미로운 사건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이번 미 대선에서 과연 누가 최종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게 될지 미국 유권자들의 최종 선택을 기대해 보는 한편, 패션 칼럼니스트로서 필자는 이번 기회를 통해 정치와 패션에 관한 이야기를 잠깐 해보려 한다.
▲힐러리 클린턴 후보의 얼굴이 프린트된 티셔츠를 입고 있는 ‘보그’지의 편집장 안나 윈투어
미국 현지 시각 10월 18일 패션지 ‘보그(Vogue)’는 공식적으로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인 힐러리 클린턴 지지를 선언했다. 보그지의 역사상 대선 후보 지지 선언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이 낯설게 느껴지지만은 않는다. 클린턴 후보는 학창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던 엘리트였고 존재감이 컸던 영부인이었다. 이후 국무장관에서 현재는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 후보에까지 오른, 그 누구보다 열심히 달려온 이 시대 여성의 표본처럼 보이는 인물이다. 그런 그녀에 대한 보그의 지지는 언뜻 당연하게까지 생각된다. 하물며 편집장인 안나 윈투어는 오랜 기간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하며 선거캠프에서 그녀의 스타일 자문까지 담당하지 않았던가.
▲두 번째 대선 티비 토론회에서의 힐러리 클린턴 후보
필자가 그동안 가지고 있던 클린턴 후보에 대한 이미지는 두번째 대선 티비 토론을 본 이후에야 비로소 달라졌다. ‘여성 차별주의자’라는 정치적 공세를 받는 트럼프, ‘준비된 여성 대통령 후보’로 이야기되는 클린턴이 등장하는 순간, 환한 빛을 머금은 클린턴의 모습은 좌중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날 그녀가 선택한 의상은 탁월했다. 짙은 색의 바지 정장과 흰색에 가까운 회색빛이 감도는, 밝지만 차분함을 읽지 않은 색상의 재킷 라펠(lapel) 또한 그것과 매치된 안쪽의상의, 말끔하고 단정한 그녀의 금발머리는 그 어느 때보다 그녀를 당당하고 경쾌해 보이게 했다. 여기에 밝고 여성스러운 그녀의 메이크업은 그동안 걱정거리처럼 따라다니던 건강에 대한 세간의 우려를 말끔히 씻기기에 충분했다. 거기에 우아하고 여유 있는 밝은 미소까지. 그녀는 정말로 준비되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그녀가 추구하는, 그리고 그렇게 보이기를 원하는 ‘정치인 힐러리 클린턴’의 이미지는 그날 미국에서만 칠천여 만명이 시청한 텔레비전 화면 속에 고스란히 담겼다. 정치인에게 패션은 단순한 치장을 넘어선다.
▲ 버락 오바마 대통령 임기 마지막 국빈만찬에서의 영부인 미셸 오바마
보그에서 힐러리 클린턴 후보에 대한 공식지지 선언을 하던 날, 백악관에서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임기 마지막 국빈만찬이 있었다. 미국을 방문 중인 이탈리아의 마테오 렌치 총리 부부와의 만찬에서 영부인 미셸 오바마는 이탈리아 출신 패션 디자이너 베르사체의 장밋빛이 감도는 금색 드레스를 입었는데, 이는 아뜰리에 베르사체(Atelier Versace) 제품으로 도나텔로 베르사체가 직접 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평소 센스 있는 패션 감각으로 유명한 영부인의 이날 의상 선택은 이탈리아에서 온 손님들을 위한 그녀의 세심한 배려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미지가 중요한 정치계에서 패션은 때로는 자신의 이미지를 각인시키기 위해, 다른 한편으로는 상대 국가를 배려하기 위한 중요한 외교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물론 여전히 정치와 패션의 관계에서 유독 여성 정치인들에게 언론이 집중적으로 조명된다는 것은 씁쓸한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자신을 위한 장점으로 이용한다면, 혹은 정치인이 대중에게 조금 더 친근한 이미지로 다가갈 수 있는 수단으로 활용한다면 보다 유리하고 긍정적인 면으로 작용할 수 있는 측면이 분명 있으리라.
한문희 패션칼럼리스트
moonhee1225@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