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人 3色, 그때 그 시절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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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人 3色, 그때 그 시절 (2)
  • 서인애 기자
  • 승인 2016.03.03 15: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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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대신문의 살아있는 역사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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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환

명대신문사 48기

현 일요신문 사회부 기자

 

Q. 신문사에 들어오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요?

군대에서 ‘토토의 눈물’이라는 책을 읽었다. 일본의 여자 방송인이 방송에 나와 전 세계의 빈민 어린이를 돕는 얘기를 하는데 방송의 영향력으로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러다가 환경생명공학과에서 디지털미디어학과로 전과를 하게 됐다. 처음에는 신문사 할 생각은 없었는데 친목 위주의 학회 활동을 통해서는 얻고 싶은 것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새로운 것을 하고 싶어서 2학년 2학기에 신문사를 지원했다.

 

Q. 당시 신문사의 분위기는 어땠나요?

그때 신문사 대부분이 여학생이어서 내가 있을 분위기가 아니었다. 원래 한 학기만 해볼 생각이었는데 첫날부터 파발마 하나 때문에 밤을 꼬박 새웠다. 신문사 하면서 2학년 2학기부터 4학년 1학기까지 마감 때 거의 1~2일 빼고는 밤을 계속 샜다. 신문사에 침대가 있었는데 시험 기간과 마감 때 많이 이용했고 마감 때는 조판 가기 전에 10분 정도 자고 시험 기간에는 거의 합숙했다. 잠은 보통 테이블 위에서 잤다.

 

Q. 힘들었던 순간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마감 시작해서 조판이 거의 다음 날 오후 9ㆍ10시에 끝나는데 하루 꼬박 새우고 밤까지 뜬눈으로 있었다. 조판 끝나고 차가 끊기면 근처 DVD방 가서 다 같이 잤다. 조판할 때 매일 늦게 털레털레 가서 밤늦게까지 하니까 빨리해달라고 담당자분이 짜증도 많이 냈었다.

가장 큰 위기였을 때는 들어오고 난 후 다음 학기가 됐을 때이다. 편집장, 기획부 3명, 보도부가 나 혼자 총 5명이었다. 그래서 보도부 일을 혼자 다 하게 됐고 그러다가 기획부 2명이 나가서 3명이 거의 한 학기 했었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었고 고생 많이 했다. 그때 나라 잃은 것처럼 술을 많이 마셨는데 취해서 편집국장을 도로로 떠밀었던 적도 있었다. 추억이 아니라 인간의 밑바닥까지 볼 수 있는 것이 너무 많았다. 신문사 하다 보니 감정소비가 심했고 심리적으로 힘들었다.

사람이 많을 때가 있고 적을 때가 있었는데 나가는 것도 유형이 있다. 혼나서, 진짜 힘들어서, 학교생활이 중요해서 등 나가는 유형이 다양하게 있다. 한번은 연락이 두절되는 후배가 있었다. 방중 활동 할 때 갑자기 연락이 안 돼서 자는 줄 알았는데 이후에 알고 보니 일부러 연락을 받지 않은 것이다. 그 후배는 고시원도 몰래 정리하고 군대에 갔다.

 

Q. 신문사의 전통이 있었나요?

예전에는 수습을 떼는 날에 회식이 있었는데 회식하고 나서 정문 앞에서 한 명씩 돌아가면서 인사를 해야 하는 것이 전통이었다. 선배들 다 찻길 건너편에 있고 한 명이 정문 앞에서 큰소리로 인사를 해야 하는데 목소리가 작으면 통과 못 해서 통과할 때까지 했었다.

학기 초에는 문화행사가 있었는데 같이 뮤지컬이나 연극을 보러 다녔다. 어느 날 대학로를 가기로 했는데 같이 가기로 한 과장님의 어머님께서 당일 아침 쓰러지셨다. 과장님께서 표를 가지고 계셔서 택시를 타고 표를 가지러 갔는데 10분이면 가는 길을 거의 30분을 헤맸다. 결국은 주변에 내려서 뛰어가는데 마침 어머니가 구급차에 실려 가시고 있었다. 죄송했던 기억이 난다.

 

Q. 기사를 쓰는 과정에서 있었던 흥미로운 사건은 무엇인가요?

보도부는 학내 기사를 다루다 보니까 이슈가 많이 됐다. 학생복지팀에서 동아리에 대해 평가를 하는데 평가에서 미달된 동아리는 탈락을 시킨다는 것을 제보를 받아 기사를 썼는데 파장이 컸다. 그래서 동아리 연합회 회장과 사이가 틀어졌다. 기사가 나가고 며칠 지나고 샤워실에서 동아리 연합회 회장과 마주쳤다. 회장이 등을 밀어주겠다고 해서 등을 맡기고 얘기하다가 잘 풀게 됐다.

한번은 대학생 피라미드(다단계) 관련해서 기사를 쓰고 싶어 다단계 업체에 접촉해서 만난 적이 있다. 다단계를 통해 성공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의심스러웠는지 가방을 열어보라고 했다. 가방에 취재수첩이 있어서 실패하고 돌아온 기억이 있다.

학교를 계속 돌아다니면서 소재 찾다가 한번은 유병진 총장 동상에서 안경이 떨어져서 자세히 보니까 코 부분이 떨어졌었다. 그래서 기사를 쓰려고 했지만, 며칠 후에 안경이 다시 달려서 쓰지 못했다.

숫자로 정리한 기사가 있었는데 2ㆍ3일은 창고에서 다 찾아보고 도서관 사료실에서 장갑 끼고 찾았다. 그 기사 만들고 힘들다고 두 명이 나가버렸다.

 

Q. 신문사를 정의해본다면 무엇인가요?

내 대학생활 대부분이 신문사였다. 학보사를 하면서 느끼는 게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독립적이지 않아서 자유롭지도 않다.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면 학보사는 그게 끝이라고 생각했다. 한계를 무너트리지 않더라도 무너트리기 위해서 싸우는 것이 학보사 기자라고 생각한다. 크게 달라지는 것이 없어도 우리가 싸웠다는 것에 의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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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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