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서바이벌가이드의 올바른 사용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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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서바이벌가이드의 올바른 사용법 (1)
  • 구희주
  • 승인 2014.12.13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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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문화상 소설 부문 당선작> 좀비서바이벌가이드의 올바른 사용법 (1)

좀비서바이벌가이드의 올바른 사용법

 

배상현 계명대학교(문예창작학과 08) 학생

 

0. 사태를 항상 주시하라

 

사도세자로 더 유명한 이현은 어려서부터 궁 밖으로 사냥을 다니길 즐겼다. 이현은 총명하고 무예에 대한 조예도 깊어 영조의 총애는 대단했다. 이현이 사냥을 나갔다가 다치고 돌아왔을 때부터 영조와의 갈등이 깊어졌다. 이현은 사냥 직후 홍역 비슷한 병을 앓았으며, 그 뒤로 심성이 매우 사나워져 궁녀나 내시를 공격해 죽이기 일쑤였다. 완전히 미친듯 보이는 행동거지와, 대신들의 거듭된 상소에 못 이겨 영조는 결국 이현을 죽이기로 한다. 하지만 사약을 내려도 죽지 않자, 집행인들은 당황한다. 왕의 혈족의 몸에 칼을 드리울 순 없었기 때문에, 결국 이현은 뒤주 속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이현은 9일이나 지나서야 죽음을 맞는다. 그 죽음이라는 것도 실록의 기록일 뿐, 확실한 것은 아니다.

 

좀비사태는 항상 존재해왔다. 다만 우리가 보고도 못 본 척, 애써 모른 척 할 뿐이다.

마야의 예언은 2012년 12월 21일을 멸망의 날로 지목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멸망의 원인을 정확히 지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인터넷에는 온갖 설이 나돌았고, 그 중 몇몇은 그럴 듯 했다. 그럴듯한 게 너무 많아서 오히려 헷갈렸다. 난 헷갈려하는 사람들을 보며 이해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당연히 좀비로 인한 멸망이지, 그 외의 이유가 있을 리 없지 않은가.

 

2012년 5월 26일, 미국의 20대 청년이 갑자기 60대 노숙자의 얼굴을 물어뜯었다. 경관의 제지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말리다 못한 경관이 총을 여러 발 발사했지만 청년은 총을 맞으면서도 묵묵히 노숙자의 얼굴을 갉아먹었다. 거듭된 총격으로 겨우 행동을 멈췄을 때, 노숙자의 얼굴은 80%이상이 훼손된 상태였다.

정말 좀비가 발생한 것인지에 대해 의견은 분분했고, 인터넷상의 종말론자들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드디어 때가 온 거야, 라며. 기대에는 대게 실망이 뒤따른다. 미국 경찰은 신종 마약에 의한 사고였다고 발표했고, 여론은 가라앉았다. 하지만 종말론자 중에서 발표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나도 믿지 않았다.

 

1. 무기를 확보하라

 

나는 무기를 준비했다. 사태가 일어나면 쓸 만한 무기와 식량은 금방 동이 난다. 먼저 선점해야 조금이라도 더 좋은 무기를 선택할 수 있다.

좀비는 기본적으로 느릿느릿 걷는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최근의 좀비 물을 보면 대게 좀비들은 뛰어다니거나, 심지어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그런 가능성은 배제하기로 했다. 개인적인 생각이기는 하지만, 죽은 사람은 절대 산 사람보다 뛰어날 수 없다. 죽인 사람이 산 사람보다 뛰어나다면 살아있는 것에 대한 메리트가 없지 않은가. 어쨌든 좀비가 느리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튼튼한 무기와 사전지식이 있을 경우에 좀비란 상상보다는 대적하기 쉬운 상대다.

 

일반 가정집에 있는 무기로 쓸 만한 물건을 한번 꼽아보자. 식칼, 행거나 커튼봉, 가정용 망치나 장도리. 아마 이것을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 좀비의 두개골을 깨부수고, 뇌를 파괴할 만한 위력을 지닌 무기가 얼마나 있을까. 게다가 항상 좀비에게 물릴 위험을 가지고 있으므로 적당한 사정거리와 취급의 용이성을 겸비하고 있어야 한다. 「좀비서바이벌가이드」에선 추천 무장을 쭉 열거하고 있지만 당신이 한국인이라면 거의 무시하라.

이 책의 저자는 미국인이고, 그렇기 때문에 자기나라 사정에 맞춘 생존법을 썼기 때문이다. 총기의 자유가 있는 미국에서는 무장도 마음대로겠지만, 한국에서 이 정도의 무장을 하려면 좀비보다 경찰을 먼저 조심해야 할 것이다. 도검류는 규제가 덜하지만, 번거로운 도검소지허가증이 필요하다. 사태가 일어나 치안이 위험할 때, 흉기를 몇 개씩이나 소지한 위험인물을 곱게 볼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래도 한국 법률에 맞는 무기가 하나쯤은 있을 터였다. 나는 페이지를 넘겼다.

적혀있는 쓸 만한 무기 중,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배척이었다. 흔히들 빠루, 크로우바 등으로 부르는 이 공구는 얼핏 보면 지팡이를 닮았다. J자 모양으로 완만하게 휘어진 이 철 몽둥이는 그 자체로 단단하고 파괴력 있는 무기이면서, 유사시에 문이나 상자를 부술 수 있는 유용한 도구가 되기도 한다. 직접 해본적은 없지만, 못을 뽑는 부분으로 머리를 내리치면 충분히 두개골을 부수고, 뇌수를 휘저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평상시에 집에 놔둬도 그리 큰 위화감이 없다는 점이 좋았다.

직접 철물점에 가기는 쑥스러워서, 11번가에서 이 만 원 남짓의 물건을 하나 주문했다. 일 미터 약간 안 되는 그 철 몽둥이가 도착하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든든해졌다.

 

주문을 하고 문득 책상 위를 보니 책상은 온갖 것들로 어지러웠다. 책과 연필은 그렇다 쳐도 접시와 비누조각은 왜 있는 건지, 출처를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좀비에게 살아남기 위해서는 부지런해야 한다. 근면해야 한다. 이런 사소한 것 하나도 이제는 허투루 볼 수 없었다. 내일부터 동네라도 한 바퀴 돌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커다란 봉투를 가지고 와 잡동사니들을 쓸어 담았다. 무용(無用)한 것들 투성이었다. 일부러 한자까지 곁들여가며, ‘무용(無用)’이라 강조하며 적은 것은, 정말이지 쓸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좀비사태가 일어나면 절대 가져가지 않을 것들 말이다. 책상 한구석에 쓰러져 있지도 않고 용케 서있는 물건이 있었다. 얼핏 보면 지구본 모양이었지만 돌아가는 구체에 프린트된 사진은 지구의 모습이 아니었다.

구체는 달 모양을 하고 있었다. 지구가 프린트된 것이 지구본이라면, 이것은 달본이라 해야 할 것이다. 사실 나는 왜 이것이 내 방에 있는지 모른다. 군을 전역하고 돌아와 보니, 이미 방 책상위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방치되어 있었는지, 구체 윗면에는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다. 손으로 털어내자 단단히 들러붙어 있던 먼지가 이내 찐득거렸다. 약간 끈적이는 구체를 이리저리 돌렸다. 여행가나 학자가 아닌 바에야 지구본은 세계지도보다 조금 더 재미있는, 그저 조형물에 지나지 않는다. 적어도 나한테는 지구본은 무용한 것이었다. 하물며 지구본도 아닌 달본이라니. 오른손으론 달본을 잡고, 왼손으론 봉투를 벌렸다. 그대로 봉투에 처넣으려다 마음이 바뀌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단순한 변덕이었다. 쓸모없었지만, 그 쓸모없음이 마음에 들었다. 사태가 일어나면 절대 배낭에 집어넣지는 않을 물건이지만, 적어도 사태 전까지는 내 방 한구석에 있어도,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주문한 배척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6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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