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는 미래의 오늘이다. 창의성 교육의 선구자인 길포드Guilford 박사, 그는 1950년도 미국 심리학회 회장 취임 연설에서 창의성에 무관심한 것에 대해 “우리 대학 졸업생들과 관련해서 내가 자주 들었던 불만은……이들이 배정받은 과제는 이미 배운 기술을 활용해서 수행하나, 새로운 해결 과정이 요구되는 문제에서는 전혀 손을 쓰지 못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60년 전의 상황이라고 하기에는 정말 생생하지 않은가? 과거는 잊히거나 지워지는 것이 아니다. 미래의 시점에서 보면 과거는 오늘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의 대학에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오늘날 우리 대학은 창의성을 가진 인재를 길러내고 있는가?
창의성은 무엇일까? 첫째, 필자는 창의성을 ‘새로움에 이르는 개인의 사고 관련 특성’으로 정의한다. 이는 ‘새로움’에 주목한 학술적 정의다. 창의성은 새로움을 이상으로 삼는다. 공부하고 생각하는 행위의 최종 목적지는 사고의 독창성이다. 창의성을 사고의 융통성과 고정 관념의 타파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사고의 융통성과 고정 관념의 타파는 창의성에 이르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다. 둘째, 창의성은 ‘개인’으로 정의된다. 창의적인 사고를 하다 보면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는 상황에 도달한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오로지 자신의 생각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극한 상황에서 개별적 존재인 ‘개인’은 절대적인 의미를 갖는다. 창의적 사고의 역량을 충분히 가진 개인이 모여 집단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면 충분히 좋은 사고를 할 수 있고,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공동체를 이룰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창의성은 ‘사고 관련 특성’으로 정의된다. 이는 창의성을 능력으로만 받아들이지 말고, 창의적으로 사고하는 태도를 강조하고 있다.
창의성은 ‘똘 것’과 같다. 이 말은 ‘둑에서 자란 것’을 뜻하는 호남지방의 방언이다. 농부들이 농토에 씨앗을 뿌리는 과정에서 씨앗의 일부가 밭둑이나 논둑에 떨어져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리게 된다. 논밭에서 자라는 씨는 물이 부족하거나 병이 오면 이겨내지 못하지만 둑에서 자란 씨는 강한 생존력을 보이게 된다. 창의성을 생존력이 강한 ‘똘 것’이라 본다면 강한 생존력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똘 것’은 몹시 필요한 것이다. 이는 대학이 창의성을 가진 인재를 키워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필자는 창의성을 ‘생각의 창고를 깨는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 말은 창의(創意)라는 한자를 파자하여 얻은 생각이다. 글자 ‘創’을 파자하면 ‘倉(창고)’과 ‘刀(칼)’가 된다. 이렇게 보면 생각(意)이 들어 있는 창고를 칼로 해체하는 것이 창의성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생각을 칼로 해체하는 행위를 반복적으로 하는 ‘창의의 순환 상태’에 들어서게 된다. 예를 들어 사랑을 창의의 순환 상태에 대입해보면 금방 이해가 된다. 사랑이라는 생각의 창고를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그 사람은 창의적인 사랑을 할 수 없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생각의 창고를 해체하고 새로운 생각으로 창고를 채우게 되면 또 다른 사랑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 새로운 사랑도 이미 창고에 들어 있는 생각이기 때문에 곧 해체해야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또 다시 새로운 사랑을 채워 넣어야 한다. 창의의 세계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셈이다.
창의성은 ‘두 번째 생각’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필자가 말하는 ‘첫 번째 생각’은 같은 문화권에서 생활하면 공통적으로 가질 수 있는 생각을 말한다. 첫 번째 생각을 하다보면 자연스레 서로의 생각이 겹칠 수도 있다. 여기서 창의성을 두 번째 생각이라고 해보자. 두 번째 생각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누구나 말할 수 있는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두 번째 생각부터는 다양한 생각을 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창의성은 공통적으로 할 수 있는 생각 외의 다양한 생각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창의성에 대해 알아가다 보면 창의성은 자연스레 ‘내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필자의 글을 통해 독자들이 창의성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란다.
현대창의력연구소 임선하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