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p. 간도는 우리 땅
상태바
Tip. 간도는 우리 땅
  • 관리자
  • 승인 2009.09.01 16: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배워봅시다!

 

Tip. 간도는 우리 땅

간도의 위치: (스캔첨부)간도는 좁은 의미로 볼 때 백두산정계비에서 언급된 두만강 이북과 토문강 이동 지역인 동간도 혹은 북간도를 의미하지만 넓은 의미로는 압록강 이북 지역인 서간도를 포함한 남만주 전체를 가리킨다. 특히 동간도는 노령산맥 이동을 동간도 동부. 즉, 세칭 북간도이며 노령산맥 이서를 동간도 서부로 구분한다. 간도협약 시 한ㆍ중 양국 민이 잡거구역으로 규정한 곳은 동간도 동부지역이다.

간도 명칭의 유래: 간도間島는 원래 함경북도 종성에서 10리쯤 떨어진 두만강 가운데 있는 섬의 이름이었다. 19세기 말 1870년경부터 ‘사잇섬에 농사 지으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강을 건너 백두산 동쪽 기슭의 비옥한 토지를 개간하는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간도는 강 이북의 비옥한 땅을 의미하는 말로 통용되기 시작했다. 후에 조선 사람들韓民族이 개간한 땅이라는 뜻을 담아 ‘간도墾島’라 부르기도 했다.

간도가 우리 땅인 이유:

1. 청나라와 조선이 1727년 맺은 강도회맹에 의해 봉금지역이 된 간도지역은 무주지로서 양국이 공동 관리하는 지역이었다. 무주지는 국제법적으로 먼저 선점하여 개간하는 쪽이 영유권을 가지게 되는데 간도에 대한 조선족의 개간은 무주지 선점이론에 의한 영토획득의 의미가 있다.

2. 조선 조정에서 1900년과 1903년 서간도 및 동간도(북간도)를 행정적으로 평안북도 및 함경도에 편입시켰으며 주민에게서 세금을 징수하여 행정과 군인훈련비로 충당하였다.

1897년 서상무를 서 변계 관리사로 임명하기도 했으며, 1900년경 평북관찰사 이도재는 압록강 대안지역을 각 군에 배속시키고 충의사를 조직했다. 1902년 5월 21일 간도 시찰사로 임명받은 이범윤은 사포대를 조직하고 간도 한인으로부터 세금을 받아 그 비용에 충당하기도 했다고 알려져 있다.

간도협약 일부:

제 1조. 청ㆍ일 양국정부는 도문강을 청ㆍ일 양국의 국경으로 하고 강원에 있어서는 정계비定界碑를 기점起點으로 하여 석을수石乙水로써 양국의 경계로 할 것을 성명聲明한다.

제 3조. 청국정부는 종래와 같이 도문강 이후의 간지墾地에 있어서 한국민 주거를 승인한다.그 지역의 경계는 별도로써 이를 표시한다.

제 6조. 청국정부는 장래 길장철도吉長鐵道를 연길남경延吉南境에 연장하여 한국 회령會寧에서 한국 철도와 연결하도록 하며 그의 일체 변법辨法은 길장철도와 일률로 하여야 한다. 개변開辨의 시기는 청국정부에서 정형情形을 酌量하여 일본국 정부와 상의한 뒤에 이를 정한다.

 


/이재희 준정기자 jella1007@mju.ac.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 인문캠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거북골로 34 (명지대학교) 학생회관 2층
  • 자연캠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명지로 116 학생회관 2층
  • 대표전화 : 02-300-1750~1(인문캠) 031-330-6111(자연캠)
  • 팩스 : 02-300-1752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승환
  • 제호 : 명대신문
  • 창간일 : 1954년 11월
  • 발행인 : 유병진
  • 편집인 : 송재일
  • 편집장 : 한지유(정외 21)
  • 디자인·인쇄 : 중앙일보M&P
  • - 명대신문의 모든 콘텐츠(영상, 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명대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jupress@hanmail.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