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식성 인문학자의 세상읽기] 시민과 벌레, 우리에겐 어떤 국민서사가 필요한가 〈1116호〉
상태바
[잡식성 인문학자의 세상읽기] 시민과 벌레, 우리에겐 어떤 국민서사가 필요한가 〈1116호〉
  • 강부원 인문학협동조합원
  • 승인 2023.05.15 14:4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강부원 인문학협동조합원
강부원 인문학협동조합원

한국 사회에서 5 · 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평가와 해석은 개인과 집단의 역사관과 정치적 (무)의식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표지가 됐다. 여전히 1980년 5월 광주에서의 민주화운동을 폭도들이 벌인 난동으로 기억하거나 꾸며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건전한 역사의식을 지닌 시민들은 5 · 18 광주민주화운동을 한국 민주화의 중요한 분기점이자 고결한 희생으로 받아들인다. ‘민주’와 ‘자유’를 자연스럽게 누리고 살고 있는 현재의 우리 모두가 광주에 큰 빚을 지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5 · 18은 20세기 말 한국 사회가 경험한 가장 잔혹한 국가폭력이자, 독재 권력이 시민들을 상대로 무자비하게 저지른 범죄행위였다. 1980년 5월에 경험한 고통과 시련은 이후 오랫동안 불의와 독재에 저항할 수 있는 시민들의 자원으로 활용됐다. 공교육의 커리큘럼에서 밀려난 그해 오월의 숭고한 희생과 처절한 기억들은 ‘은밀한 학습’과 ‘비정규적 교육’을 통해 후속 세대에게 끊임없이 전달되기도 했다. 현재 40대 이상의 세대인 1980~90년대 학번들은 대학에 입학하게 되면 광주의 실상을 담은 비디오 영상을 보는 것이 중요한 통과의례였다. 농촌이나 공장에서도 이동 상영을 통해 오월의 광주는 끊임없이 반복 재생됐다.

그러나 정권의 성격에 따라 광주의 기억을 특정한 방식으로 윤색하거나 오염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광주시민들의 저항이 북한의 사주에 의해 일어난 일이라거나, 북한에서 보낸 간첩이 시민군 속으로 깊숙하게 침투돼 있었다는 따위의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은 툭하면 불거져 나온다. 민주화 역사를 폄훼하고, 분열을 일으키려는 목적을 지닌 이들이 만들어 낸 말이다.

황당한 주장은 시도 때도 없이 반복되고, 위기를 맞은 민주 진영이 곤경에 처할 때마다 더욱 무성해진다. 물론 보편적이고 성숙한 민주시민들에게 이런 수준 낮은 공작과 비열한 공격이 타격을 줄 리 만무하다. 하지만 일부 극우학자와 정치인, 일베 출신의 보수 유튜버들에게는 광주 폄하와 민주화에 대한 비하가 밥벌이처럼 돼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인정하고 싶지않지만, 세상에는 벌레처럼 사는 사람도 있다.

오랜 독재를 경험했던 한국 사회가 격렬한 투쟁을 거쳐 민주주의로 방향을 선회한 뒤에야 비로소 오월의 광주는 민주화의 기점이자 성지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됐다. 그렇게 되기까지 역사 왜곡과 기억의 훼손에 맞선 시민들의 오랜 싸움의 시간이 있었다. 21세기에 접어들어서도 이 같은 불멸의 신화가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5 · 18 광주민주화운동을 일종의 ‘국민서사’로 안착시킨 문화콘텐츠의 힘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2030세대들이 영화 <택시운전사>와 <1987>을 통해 5 · 18 광주민주화운동을 간접경험하고 받아들였다. 이 영화들이 오월의 광주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키고 갱신했다.

국민서사란 국민 전체의 마음과 감정을 동요하거나 격발할 수 있는 공동체의 체험과 기억에 관한 이야기를 일컫는다. 국민서사의 얼개는 대체로 사회 구성원 전체가 경험한 과거의 상처를 어루만져 개개인의 삶의 의지를 북돋는 방식으로 짜여있다. 어떤 성격과 내용의 국민서사가 유행하는지에 따라 당대의 시류와 정치적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다.

한국전쟁과 산업화 시기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분투했던 세대들에 대한 호의적인 기억과 인식을 담고 있는 영화 <국제시장>의 정서가 권장되는 시절이 있었다. 또한 민주화 과정의 고난과 역경을 온몸으로 경험한 세대에게 바치는 헌사격인 영화 <변호인>이 환호를 받은 때도 있었다. 이질적인 것처럼 보이는 갈래가 다른 두 종류의 국민서사는 동 시기에 분출돼 경합을 벌이기도 한다. 이처럼 세계는 명확하게 분리되지 않고, 대중의 취향과 기호 역시 무 자르듯 분절되지 않는다.

다만 분명한 것은 국민서사화된 역사에 대한 새로운 감각이 공통의 기억과 부채 의식을 지닌 시민들로 하여금 앞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갈 잠재성과 가능성을 품게 만드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어느 세대의 경험과 기억이 더 윤리적이냐, 올바른 것이냐 대한 해묵은 논란은 더 이상 말싸움으로만 진행 되지 않는다. 이제 어느 지형의 힘과 의지가 더 강한지를 증명하는 일은 좀 더 문화적인 개입과 판단을 요구하게 됐다. 한국에서 역사 해석의 주도권은 이제 국민서사화의 가능성 여부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연 ‘시민’과 ‘벌레’의 삶 중 어떤 쪽이 국민서사가 돼야 마땅할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 인문캠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거북골로 34 (명지대학교) 학생회관 2층
  • 자연캠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명지로 116 학생회관 2층
  • 대표전화 : 02-300-1750~1(인문캠) 031-330-6111(자연캠)
  • 팩스 : 02-300-1752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승환
  • 제호 : 명대신문
  • 창간일 : 1954년 11월
  • 발행인 : 유병진
  • 편집인 : 송재일
  • 편집장 : 한지유(정외 21)
  • 디자인·인쇄 : 중앙일보M&P
  • - 명대신문의 모든 콘텐츠(영상, 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명대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jupress@hanmail.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