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식성 인문학자의 세상읽기] 구로의 등대와 IT 무간지옥 〈11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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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식성 인문학자의 세상읽기] 구로의 등대와 IT 무간지옥 〈1115호〉
  • 강부원 인문학협동조합원
  • 승인 2023.05.10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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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부원 인문학협동조합원
강부원 인문학협동조합원

대학의 이공계 선호 현상이나 문과 천대 문화가 점차 심화되고 있다. 한국의 기술교육과 직업교육이 대부분 컴퓨터 프로그램, 특히 코딩과 게임 개발 관련 분야에 집중되다 보니 인력시장 구조도 심각하게 편향됐다. ‘인공지능’과 ‘디지털 사회’를 내세우며 앞날을 전망하고 기술을 익히는 흐름을 탓할 수 없지만, 이렇게 육성된 인력이나 자원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은 문제다. 쏟아져 나오는 공급인력이 많아질수록 이들의 노동조건이나 노동환경을 따지기 어려운 상황이 돼 버린다. 너 아니어도 일할 사람 많다는 인식이 사용자의 머릿속에 박혀 있는 이상 노동조건 개선은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렵다.

옛 구로공단 자리가 가산디지털단지로 재편되면서 많은 IT 게임 기업들이 몰려들었다. 판교의 집값 상승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이곳 업체들의 특징은 한밤중까지도 불이 꺼지지 않고 야근을 한다는 것이다. 국내 최고의 유명 게임 개발 업체 사옥은 심지어 ‘구로의 등대’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높고 웅장한 그 건물이 밤새도록 환한 불빛을 밝혀주기 때문이다. 새벽 2~3시가 넘어서야 귀가하는 직원들을 태우려는 택시들의 행렬이 새벽녘까지 그 회사 앞을 대기하는 모습은 장관을 이룬다. 이런 것이 바로 뜻밖의 경제적 효과라면 너무 우울하다.

얼마 전 한 텔레비전 시사 고발 프로그램에서 IT 기술자들이 불법적인 인터넷 도박 사이트 운영 조직에 쉽게 매수돼 피해를 입는 사례들을 다뤘다. 저임금-고강도 노동에 시달리는 IT 기술 인력들은 그것보다 조금 나은 조건을 제시한 해외에 불법 서버를 운영하는 사설 도박업체들에 너무나 쉽게 포섭됐다. 구직사이트에 “해외 근무 가능자, 월 300만 원 보장” 정도의 조건을 내걸자 금세 사람들의 전화가 빗발쳤다. 이 정도 노동조건 제시만으로도 구름처럼 몰려드는 IT 인력의 사연은 한국의 IT 기술자들이 어떤 대접과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렇게 모여든 값싼 인력과 불법 자본이 활용돼 ‘누누티비’같은 기현상을 만들어 냈다. 콘텐츠 강국의 어두운 이면이다.

한국이 자랑하는 IT 게임 기술은 과포화된 노동시장의 기술 인력들을 쥐어짜는 방식으로 성장했다. 일을 너무 많이 하다 보니 이제 정말 컴퓨터보다 더 기계처럼 일하고, 매크로 돌리듯 자동으로 일만 하는 노동자가 된 셈이다. 한국의 IT 게임 산업계는 지난 몇 년 동안 수많은 과노동 자살자와 우울증 환자를 만들어냈다. 어떤 IT 게임 기업에서는 살인적인 노동과 성과 스트레스를 견디다 못해 한 달 새 4명이나 투신자살한 적도 있다. 주당 평균 근로시간 57시간 이상, 밤샘을 밥 먹듯 하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경쟁력이 있다는 게임 산업을 이끌어가고 있다.

알다시피 이들 업계의 대표들은 정치인과 검사들에게 막대한 현금이나 주식을 주고 정권에 빌붙어 각종 이권과 특혜를 얻어낸다. 이들은 권력에 의해 보호받고, 노동자를 착취하며 천문학적 이익을 얻는다. 반면 최저임금을 받아 가며 일하는 알바들과 청년 노동자들은 이렇게 만들어진 게임을 다운받아 한 달에 기십만 원씩 쓰는 ‘과금러’가 된다. 이 틈 사이를
조금 기민한 치들이 파고들어 좀 더 과감하게 편법과 탈법을 감행한다. 인터넷 도박 사이트를 운영한다든지 게임 아이템을 거래하거나 사기 치는 방식으로 이윤을 창출한다.

게임 업계에서 통용되는 ‘크런치 모드’라는 노동 형태가 있다. 게임 개발 혹은 출시를 목전에 두고 두세 달 집에 가지 않고 잠도 안 자며 초고강도로 일하는 것을 말한다. 심정지와 하지정맥류가 올 정도로 말 그대로 목숨을 위협하는 고된 노동이라 업계에서도 큰 문제로 지적된다.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 대통령은 “이거 보라”라며 “1등 하는 이유가 있다”라고 ‘크런치 모드’ 노동의 효율성을 역설하고 있다. 선거 공약으로 주당 120시간 노동이 가능한 사회를 만들겠다고 내걸더니, 대통령이 돼서는 진짜로 주당 92시간 근무가 가능토록 법을 개정하려고 한다.

일하고 싶은 만큼 일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겠단다. IT 게임 산업의 발전을 위해서라는 말도 덧보탠다. 바쁠 때 많이 일하고 푹 쉴 수 있게 해주겠다는 의도라고 밝혔지만, 죽기 직전까지 일하고, 딱 죽지만 않게 해주겠다는 말로 들린다. 더구나 게임 산업에 만연한 사행성이나 이익 독점, 사람이 죽어 나가는 스트레스 환경에 대해서 는 여전히 무관심하며 적절한 대책을 내놓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 무간지옥이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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