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식성 인문학자의 세상읽기] 비브라늄 수저의 내부고발 〈111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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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식성 인문학자의 세상읽기] 비브라늄 수저의 내부고발 〈1113호〉
  • 강부원 인문학협동조합원
  • 승인 2023.03.28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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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부원 인문학협동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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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등장한 ‘수저론’은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계급론이자 세대론으로 사용되고 있다. 누군가 웃자고 시작한 자조 섞인 농담이 이젠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회학적 분석 방법론으로 자리 잡게 된 셈이다.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흙수저로 구분되는 피라미드 계급 구조에 자신의 신분과 처지를 이입해보고, 냉정하게 위치를 확인하는게 필수 덕목이 됐다. 자신이 쥔 수저 색깔에 합당한 생활을 영위하고, 주제넘지 않은 꿈을 정하는 게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라니 어쩐지 처량하고 씁쓸하다.

수저론의 핵심은 자신의 지위와 조건이 대물림되며,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확신이 작용한다는 점에 있다. 운동장은 기울어졌고 사다리는 걷어차졌으니, 더 아래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버둥거리며 살아야 한다. 도약은 불가능하고 상승은 언감생심이다. 그러니 자신의 처지를 재빨리 자각하고 그에 걸맞은 취향과 태도를 내면화해야 한다. 가끔 개천에서 용이 났다는 소식이 들리지만 그건 이미 도시 전설급 괴담이 돼버렸다. 로또처럼 한 주에 당첨자가 몇 명씩 나오지만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행운이다.

수저론은 더 촘촘해지고 강화되고 있다. 금수저 위에 ‘다이아몬드’ 또 그 위는 ‘티타늄’, 그보다 더 높은 자리는 ‘비브라늄’이라고 칭하는 모양이다. 물론 아랫녘도 개방됐다. 흙수저보다 못해 아예 쥘 수저가 없다고 ‘무수저’란 말도 생겨났다. 금수저도 비브라늄 수저 앞에서는 그저 박박 기어야 한다. 계급도 절대적기준이 아닌 상대적으로 결정된다는 소리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괜히 위대한 법칙인 게 아니다.

그런데 가끔 별종이나 돌연변이가 나타나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다. 금수저보다 한층 더 높아 흙수저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아득한 경지에 있다던 비브라늄 수저를 물고 태어난 한 청년이 내부고발을 하기 시작했다. 자기 집안사람들이 전부 하나씩 들고 있는 수저가 불법과 탈법의 소산이며, 부정 축재한 돈이니 처벌하고 강제 징수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손자 전우원 씨 이야기다. 별꼴이다. 얼마 전 사망한 할아버지와 아직 생존해 있는 할머니,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온갖 사업을 벌이고 있는 아버지와 삼촌들을 비롯해 사촌들과 형제자매까지를 싸잡아 ‘검은돈’을 사용하는 부정한 사람들이라고 폭로해 새삼 화제가 됐다. 돈이 없다고 추징금도 안내고 있던 그 집안사람들이 지금껏 호의호식하며 살고 있다는 사실이야 삼척동자도 알고 있던 내용이었지만, 내부자가 그걸 스스로 고백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 말이다.

본인은 마약 중독자요 지저분하고 복잡한 가정사도 들춰내야 했으니, 나름에는 전부를 걸고 실행한 도박이었겠다. 같이 망하자는 소리였으니 꽤나 도발적이었다. 고발도 유튜브 공개방송 형식이었다. 과연 MZ세대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생방송 말미에는 실시간 마약 복용 쇼까지 보여줬다. 웬만한 막장극은 명함도 못 내밀 수준이다.

고발에 이르기까지 저간의 사정을 알고 보니, 자신이 재산을 고작 몇십억밖에(?) 물려받지 못해 화가 나서 그런 것이란다. 자기랑 같은 급수의 사촌들도 수백억 단위에, 아버지와 삼촌들은 수천억을 넘나드는 돈을 떡 주무르듯 만지고 있는 것이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새엄마와 이복 자매들이 자신보다 더 많이 받아먹은 게 얼마나 야속하고 화가 났겠는가. 비브라늄 수저도 차별받으면 꿈틀한다.

전두환 일가에서는 이번 해프닝을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아픈 아이’가 벌인 소동쯤으로 정리하려는 모양새다. 늘 그런 식이었다. 비브라늄 수저들이 무서운 건 카르텔의 규칙을 위반한 사람은 동족이라도 가차 없이 제거하기 때문이다. 뿌리까지 흔들릴 위험이 있을 때는 과감하게 가지를 쳐낸다. 전우원은 아마 살아생전 세상 구경을 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밥만 주는 병원에서 흰옷을 입고 살아야 할 운명이 됐다.

내부 고발한 내용대로라면 전두환 일가의 숨겨진 자산은 이미 세탁에 건조까지 뽀송뽀송하게 완료돼 이대 삼대에 걸쳐 배분돼 있을 개연성이 높다. 나라마저 일본에 기꺼이 내주겠다는 현 정권에서 이 문제를 다시 들여다볼 가능성은 현저히 낮다. 그래서 비브라늄 수저들의 새로운 취미로 내부고발이 유행할까 염려된다. 이들이 ‘별풍선’과 ‘슈퍼챗’마저 독점하면 재능 있는 흙수저는 이제 대체 무얼 먹고 살아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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