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은 세계] 그러니까, 라떼는 말이야 〈108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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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은 세계] 그러니까, 라떼는 말이야 〈1085호〉
  • 이유리
  • 승인 2021.04.19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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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칼럼은 ‘은정’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 형식의 철학 칼럼입니다. 원 저자는 이준형 작가임을 밝힙니다.

“그렇지만 회장님 저희가 그걸 따로 보내드리는 건 좀 어려워서요. 네네, 좋은 뜻인 건 저희도 알죠. 아,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희가 개인번호는 따로 말씀드리기가 어려워서요. 네, 알죠, 알죠. 들어오시면 바로 연락드리라고 할게요. 요즘 미팅이다 인터뷰다 워낙 외부 일정이 많으셔서요. 네네, 알겠습니다. 네.”

H가 같은 사람의 전화를 받은 건 어느덧 ‘영업일 기준’ 7일째였다.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자신을 모 기업의 대표이자 청년 대표들을 위한 지원 모임의 운영자라고 소개한 사람이었다. 그의 목적은 두 가지. 첫 번째는 얼마 전 모 신문에 소개된 우리 회사 대표의 개인 연락처를 받고 싶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자신이 속해 있는 경영인 모임에 이 회사의 콘텐츠를 소개할 테니 자신과 주변 지인에게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하라는 것이었다. 그쪽과 하려는 것은 ‘선한 일’이므로 대표의 연락처 정도 알려 주는 것은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니며, 자신에게는 무료로 제공하는 것일지 모르지만 경영인 모임에 콘텐츠를 소개하여 또 다른 기회를 얻을 수 있으니 이는 득이 되면 득이 되는 일이지 결코 손해 되는 일이 아니라는 논리였다. 종종 수화기 너머 ‘회장님’의 격앙된 목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아가씨, 내가 맨날 아가씨랑 얘기하자고 전화한 줄 알아? 그쪽 대표 바꾸라고. 아니면 연락처 주던가!”

곧 끝나겠지, 싶었던 전화는 다음 주가 되어서도 계속되었다. H를 불쌍하게 여긴 개발팀장 S가 대신 전화를 받았다가 30분 가까이 호통을 들어야 했고, 운영팀의 W 역시 그의 사업 성공 기를 듣느라 천금 같은 시간을 낭비해야 했다. “아니, 그쪽 양반. 내가 그쪽이랑 이야기할 정도로 하찮은 사람 아니에요. 아들한테 물려줬지만 내가 연간 80억 원씩 매출 내는 회사를 키운 사람이야. 내 귀중한 사업 경험을 그쪽 대표한테 물려주겠다는데 뭘 그리 안 된다는 게 많아. 지금 나한테 그쪽 거, 무료로 주기 싫어서 이러는 거야? 자네들 지금 그렇게 등 따시고, 배부르게 사는 거, 다 나 같은 사람들이 고생해서 일군 거야. 그건 알고 이래? 내일 찾아갈 테니까 주소 불러요. 아침에, 거, 열 시쯤 가면 사장 있지?” 점심 시간 내내 W는 특유의 성대모사 능력을 살려 수화기 너머 노신사의 목소리를 팀원들에게 묘사 했다. “그래서 내일 온다는 거야?” 팀원들의 질문에 W는 실소와 함께 대답했다. “아니, 당연히 오셔도 만나기 어렵다고 했죠. 물론 그게 먹혔는 지는 또 모르겠지만.”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 弗居 夫唯弗居 是以不去 (만물작언이불사 생이불유 위이불시 공성이불거 부유불거 시이불거)

한바탕 회오리바람이 몰아친 뒤 찾은 철학 수업에서 내 이야기를 들은 선생님은 문장 하나를 칠판에 적었다. “‘만물의 활동을 위하여 그 노력을 아끼지 아니하며, 만물을 육성시키면서도 소유물로 삼지 않는다. 일하고도 뽐내지 않고 공을 세우더라도 자신의 공로로 자부하지 않는다. 스스로의 공로라고 자부하지 않기 때문에 그 공은 항상 그에게서 떠나지 않는다’라는 문장이에요. 춘추전국시대 철학자인 노자의 『도덕경』에 담겨 있죠. 노자는 젊어서부터 주나라에서 왕실의 장서 관리를 맡아보는 수장고 관리로 근무했다고 해요. 일하는 동안 자신의 재능이 드러나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고 하죠. 꼭 책 한 권만 남겨달라고 애원한 어느 국경수비대원의 청에 못 이겨 책을 쓰긴 했지만, 그 또한 10만 자가 넘는 당시의 책과 비교해선 책이라고 보기도 어려워요. 고작 5,000자에 불과했거든요.

그 회장님 이야기를 듣다가 여기 담긴 문장 중 두 구절이 떠올랐어요. ‘공을 세우더라도 자신의 공로로 자부하지 않는다’라고 해석되는 공성이불거(功成而弗居)와 ‘자신이 만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하지 않는다’라는 생이불유(生而不 有)죠. 두 내용은 다르지만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같아요. ‘성공의 기억에 갇혀있지 말라’는 말이죠. 어떻게 보면 이건 성공하는 것보다 더 중요해요. 그 성공이 온전한 성공으로 남게 만드는 가장 강력하고도 유일한 방법이니까요. 그렇게 못하면요? 뭐, 라떼충 되는 거죠. 하하.”

수업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 그 ‘회장님’과 그의 ‘말’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어떤 삶을 살아온 사람일까. 정말 ‘회장님’으로 살아왔을까, 아니면 이제라도 회장님으로 살고 싶은 걸까? 그가 말하는 ‘선한 일’의 정의는 무엇일까. 아니, 회사가 행해야 하는 선한 일은 어떤 것일까?

이유리 작가 theyarebook@gmail.com
이유리 작가 theyareboo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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