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은 세계] 현실의 실존, 실존의 현실 〈10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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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은 세계] 현실의 실존, 실존의 현실 〈1080호〉
  • 이유리 작가
  • 승인 2020.11.16 13: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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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칼럼은 ‘은정’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 형식의 철학 칼럼입니다. 원 저자는 이준형 작가임을 밝힙니다.

“죄송하지만, 전 못 갈 것 같은데요.”

 S가 개발이사와 처음으로 날을 세운 건 입사 후 정확히 1주일이 지난 뒤였다. 올해 매출의 큰 부분을 차지할 중요 사업을 따냈으니 “오늘은 회식”이라는 공지가 있은 직후였다. “아, 그래 뭐 안 된다면 어쩔 수 없지. 요즘 젊은 친구들이 안 된다면 안 된다는 거 나도 알고 있어 요. 그런데 S 씨는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사내 행사도 참여 안 하려고 하고, 나중에 우리랑 어떻게 협업할 지 좀 걱정이네요.”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이사는 제 자리로 돌아갔다.

 

“괜찮겠어?”

“야, 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그러는 거야?”

“원칙 끝판왕이야, 끝판왕. 한 번 눈 밖에 나면 주요 프로젝트 합류는 물 건너간 거라고.”

 

 이사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기 무섭게 S의 곁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요는 이랬다. 소문에 따르면 그는 지방대를 졸업한 뒤 한 우물만 판 사람이다. 얼마나 무섭게 집중했는지 10년이 안 돼 대기업 차장급까지 올라간 사람이었다. 그러다 대표와 리버스 컴퍼니의 첫 사업 아이템에 대한 공감대를 얻고 과감하게 회사를 뛰쳐나왔다. 그가 사직서를 내밀자 회사에서는 그에게 연봉을 올려주겠다, 중책을 맡기겠다며 매달렸는데 ‘이제 자신의 일은 그게 아니’라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한다. 그리고 6개월 만에 혼자서 서비스 초기 모델을 다만들어 내더라. 지금 저 자리가 그냥 얻어진 게 아니다 등등. 그때마다 S는 일관성 있게 질문했다. “아, 그런가요? 그런데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요. 그거랑 오늘 제가 회식을 빠지는 거랑 무슨 관계가 있는 건가요?”

 S는 높은 성적으로 입사한 재원이었다. 지금까지 들어온 어떤 신입 사원보다 뛰어난 업무 역량을 보여줬지만 굳이 단점이라면 바로 질문이 너무 많다는 정도. S는 시도 때도 없이 질문 했다. 업무 중인 동료를 붙잡고, 식사 중인 상사를 붙잡고, 심지어는 사무실을 청소 중인 아주머니를 붙잡고서도 말이다. “쟤는 심지어 면접 볼 때도 우리한테 질문을 퍼붓더라니까. 유학파라서 그런가?” 대표와 함께 S의 입사 면접에 들어갔던 A는 그때마다 허허 웃으며 이야기 했다.

 “자네 나 좀 잠깐 볼까?” 잠시 뒤 J가 S를 불렀다. 그는 회사에서 가장 인기 있는 직원 중 하나다. 거침없는 말솜씨며, 매끄럽게 이어지는 글솜씨에, 사생활과 직장 생활의 적절한 균형까지. “회식은 갑자기 정해진 거고, 각자 개인 사정이 있는 거니 누가 뭐라든 상관할 필요 없어. 이사님도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꽉 막힌 분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그리고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그냥 나만의 회사생활 방침이니 듣고 참고만 했으면 좋겠어.”

 J는 자신이 실존주의자라고 말했다. “간단히 말하면 이런 거야. 이 볼펜은 실존하기에 앞서 본질이 정해져 있잖아? 그런데 자네나 나 같은 사람들은 본질보다는 실존이 앞서지. 어떤 삶을 살게 될지 모른다는 거야. 우리가 언제 응애 하면서 태어났을 때 ‘나 K전자 들어갈 겁니다’ 하며 나왔냐는 말이지. 우리는 어쩌면 자기 자신의 의미를 찾아서 늘상 여행하고 있는 건지도 몰라. 이 회사에 들어오기 전, 나는 ‘나’ 자신에 게만 집중했어.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무조건 했고, 무엇보다 나를 중요하게 여겼지.

 그런데 이런 생각에 조금 변화가 생긴 계기가 있어. D사 구조조정 때 말이야. 뉴스에도 자주 나왔으니 자네도 알 거야. 몇 년 전에 거기 경영 악화로 대규모 구조조정 있었던 거. 그때 나도 D사를 나오게 됐어. 한동안은 그냥 쉬게 되었다는 생각 덕분에 좋았는데, 점점 깨닫게 되더라고. 통장이 텅장이 되면 나도 불안해진다는걸 말이야. 외부 요인들이 내 본질에 꽤나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야.

 이후에 입사한 이곳에서, 나는 내 사생활과 회사생활을 모두 존중하려고 노력해. 그게 어찌보면 나를 지키는 방법이기도 하니까 말이야. 첫 회사지만 이런저런 말들에 흔들리지 말고 자네도 자네의 본질이 뭔지, 회사생활은 어떤 의미인지 찾아갔으면 좋겠어. 그게 꼰대라면 꼰대스러울 수 있는 내 조언일세.”

 “저 그런데 J 과장님.” 곰곰이 이야기를 듣던 S는 J의 이야기가 끝나기 무섭게 물었다. “구조 조정하면 그 사람들한테 뭐라고 하나요?”

 “글쎄, 그냥 그건 평생 모르는 게 낫지 않을까?” J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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