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은 세계]누구의 잘못〈10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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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은 세계]누구의 잘못〈1076호〉
  • 이유리 작가
  • 승인 2020.09.07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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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칼럼은 ‘은정’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 형식의 철학 칼럼입니다. 원 저자는 이준형 작가임을 밝힙니다.

  “이게 누구야? 은정 씨 아니야? 이야~ 나랑 같이 안 있으니까 얼굴 좋아졌네~.”

  지난 밤 강남역에서 마주친 Y는 내 첫 번째 회 사의 상사였다. 서른일곱 개의 이력서와 네 번 의 면접을 거쳐 들어간 나의 첫 번째 회사. 인턴 과 계약직으로 거쳐 갔던 곳을 생각하면 그곳을 ‘첫 번째’라고 부르기 조금은 민망했지만, 그래 도 그곳은 내게 ‘정규직’이라는 이름을 처음으 로 달아준 곳이었다. 이미 사회에서 자리를 잡은 친구들은 내 합격 소식이 들린 그날, 나를 낙원 가든으로 데리고 갔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 큰 상이라도 한 번 받아야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이런 날 우리가 여길 오지 언제 오겠어. 무려 양 념게장을 밑반찬으로 주는 곳이라고!” 그날만 큼은 세상을 내가 모두 가진 기분이었다.

  한 달 여의 오리엔테이션과 실무교육을 마친 뒤, 회사는 나를 기획 2팀으로 배정했다. 배정 결과를 알려주던 인사과의 K는 말끝을 흐렸다. “은정 씨는 기획 2팀인데...” 의아해하는 나에게 제법 정보통으로 이름난 동기가 속삭였다. “거 기 대리가 좀 이상한 사람이래. 그 있잖아, 배치 받고 3일만에 퇴사했다는 전 기수 선배. 그 선배 가 기획 2팀이였다고 하더라고.”

  100대 1의 경쟁도 뚫은 사람이라고.’ 그날 난 합 리화 되지 않는 합리화로 불안감을 지워버리려 애썼다.

 

  “내가 언제 그랬어요?”

 

  Y의 별명은 내언남이었다. ‘내가 언제 그랬냐 며 남탓하는 사람’의 줄임말이었다. 별명처럼 그는 자기부정을 일삼았다. 어제 괜찮다고 한 시 안이 오늘 자신의 불편한 기분이 더해지면 반려 처리되기 일쑤였고, 기껏 정해놓은 기준과 정책 도 손바닥 뒤집듯 바꾸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물 론 그로 인한 책임은 아랫사람의 몫이었다. 난처 한 상황이 닥치면 그 일은 Y가 지시한 바도, 변 경을 요구한 사실도 없는 일이 되었으니까.

  “은정 씨는 도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입사 6개월이 조금 지났을 즈음, 개발팀과의 회 의에서 돌아온 Y는 내 앞에 기획서를 내던지며 버럭 소리 질렀다. 기획 2팀을 넘어 7층의 웬만한 부서는 다 들릴 만큼의 목소리였다. “내가 기획 1년도 안 해본 애 때문에 개발팀한테 아침부터 털려야겠어?” 훈계를 들으며 바닥에 떨어진 기 획서의 빨간 줄을 살폈다. 전날 Y의 지시로 친구 와의 약속까지 취소해가며 수정한 내용이었다.

 

  "스승님, 계씨가 전유(顓臾) 땅을 치려합니 다.” 어느 날 공자(孔子)의 제자인 염유(冉求)와 자로(子路)가 헐레벌떡 공자를 찾아와 외쳤다. 계씨는 노나라 대부 가운데에도 세력이 가장 강 한 인물이었다. 지금의 중앙정부 격인 조정이 버 젓이 존재함에도 대부들이 날뛰는 세태가 공자 는 못마땅했다.

  “그게 다 너희가 정사(政事)를 잘못했기 때문 아니냐?” “저희는 이번 일에 아무런 관련도 없 습니다. 모두 계씨가 단독으로 결정한 사안입니 다.” 스승의 물음에 염유와 자로는 황급히 둘러 댔다. 두 사람은 모두 계씨 밑에서 녹을 먹는 사 람들이었다. 제자들의 대답을 들은 공자는 목소 리를 높였다. “네 놈들의 태도부터 글러먹었다. 우리 안에 있어야 할 호랑이와 코뿔소가 뛰쳐나 오고, 보석함 속의 거북과 옥구슬이 망가진다면 누구 잘못이냐?

 

  ‘ㅋㅋㅋ 그 성질 여전하지 뭐.’ 오랜만에 연락 한 첫 직장 동료는 Y의 승진 소식을 전하며 내게 답했다. 자신도 곧 이직할 것 같다는 이야기와 함 께 말이다. 그날 그 일은 누구의 잘못이었을까. 수정을 지시하곤 결과가 좋지 않자 그게 마치 내 잘못인양 소리친 Y일까, 처음부터 그게 아니라 고 소신껏 이야기하지 못했던 나일까. 조금은 멀 어진 그날의 기억을 되새기며 나는 몸을 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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