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놀로그] 을에 대한, 을을 위한 연극〈10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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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놀로그] 을에 대한, 을을 위한 연극〈1070호〉
  • 김일송 공연칼럼니스트
  • 승인 2020.04.27 11: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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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이게 마지막이야〉

  “햄버거 만들면서, 배달하면서, 서빙하면서, 커피 만들면서 계속 생각했어요. 왜 갑자기 잘렸는지. 왜 나오지 말라고 하면 그냥 나가지 말아야 하는지. 아무 설명도 못 들었어요. 이유도 정확히 몰라요. 아무 반응도 없어요. 그러다 돈이 들어왔어요.”

  지금도 학비나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 중인 학생이 있을 듯싶다. 손님이 없어서, 혹은 배달하고 여유가 생겨서. 아르바이트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이 글을 읽게 된 이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본인 의사와 무관하게 일자리를 잃은 경험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유도 모른 채 쫓겨난 경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 대사가 와닿을지도 모르겠다. 앞서 인용한 대사는 연극 〈이게 마지막이야〉에서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게 된 보람의 대사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연극 〈이게 마지막이야〉는 426일 동안 굴뚝 농성을 벌인 파인텍 노동자들을 모티프로 한다. 이 굴뚝 농성은 무려 두 차례나 세계 최장의 고공농성을 기록한 바 있다. 먼저 2015년 노동자 차광호가 정리해고에 반발하여 408일간 구미의 공장 굴뚝에서 농성을 벌인 바 있다. 사측은 공장 정상화와 단체 협약을 약속하면서 농성은 끝이 났다. 그러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2017년 노동자 홍기탁과 박준호가 목동의 열병합발전소 굴뚝에 올라 426일간 농성을 벌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 연극의 주인공이 아니다. 그들은 아예 등장조차 하지 않는다. 대신 굴뚝 농성을 벌였던 노동자의 부인인 정화와 궁지에 내몰린 ‘을’들이다. 정화는 굴뚝에서 내려온 뒤 자기만의 세계에 갇힌 남편을 대신해, 편의점 근무로 가족을 부양한다. 또 다른 인물은 정화네 아이들 학습지 교사인 선영이다, 선영은 정화의 사정을 이해해 자신이 대신 학습지 대금을 불입하며 아이들을 봐준다. 그리고 앞서 소개했던 보람이 있다. 보람은 고등학교 졸업 후, 각종 아르바이트를 전전해가며 대학입시를 준비 중인 고학생이다. 그리고 정화 남편과 함께 농성을 벌이던 명호가 등장한다.

  연극은 서로의 처지를 이해해 보듬었던 이들을 벼랑 끝 상황으로 내몬다. 본래 상황이 나쁠 수록, 인간의 밑바닥이 보이는 법. 명호는 정화에게 과거 생활에 보태라며 주었던 돈 300만 원을 다시 돌려달라고 한다. 또한 지국장으로부터 수금 압박에 몰린 선영도 이제는 학습비를 달라고 정화를 독촉한다. 정화를 가장 난처하게 만드는 이는 보람이다. 보람은 정화에게 자신을 대신해 사장에게 밀린 수당 내역이 담긴 봉투를 전해 달라고 한다. 부탁을 들어주기에 정화는 편의점 점장의 눈치를 보는 처지다. 그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닫는다. 그러나 저 행동을 두고 그들의 밑바닥이라 폄훼할 수는 없을 듯싶다. 상대에겐 말할 수 없는 그들의 속사정을, 그리고 그전까지 선의의 끈을 놓지 않으려 발버둥쳤던 모습을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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